좋은 일 하시네요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들에게 말라리아는 가깝고도 먼 병이다. 늘 말라리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주변에 말라리아에 걸리는 사람이 워낙 많은지라 그 위험성을 잊고 산다. 특히 나는 ‘내 피가 맛이 없나’하는 생각이 들만큼 평소 모기에 잘 물리지 않는 체질이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그, 말라리아에 걸릴 줄은 몰랐다. 그런데 ‘될놈될’이다. 그 나라에서 1년 넘게 지내는 동안 모기에 물린 게 열 번도 되지 않는데, 그 중 말라리아 모기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 나타난 증상은 미열이었다. 머리가 무겁고 몸이 오슬오슬 떨렸다. 퍼뜩 말라리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이상하고 억울하게도 낮에는 괜찮다가 유독 밤에 증세가 심해졌다. 아침에 멀쩡한 상태로 사무소에 출근해서 한 동료에게 농담 반 진담 반 ‘혹시 말라리아 아닐까’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너무나 단호했다.
“진짜 말라리아면 그런 말 못 해.”
그 동료를 믿었다. 모 아프리카 국가에서 꽤 긴 시간 말라리아 사업을 했던 동료였기 때문에 준전문가라는 믿음이 있었다. 잘못된 믿음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고열과 오한이 찾아왔다.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들부들 떨었다. 속으로 그 동료에게 원망을 퍼부으면서. 결국 증상이 시작된 지 4일째 되는 날 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한국 시골 구석 보건소보다도 열악해 보이는 사설 클리닉이었다. 함께 가 준 동료와 함께 말라리아 검사실에 앉아 있는데 구역감이 몰려왔다. 차마 그 검사실에서 토하는 민폐는 끼치기 싫었지만 화장실까지 갈 힘이 없었다. 결국 검사실 직원에게 토할 것 같다는 시늉을 하며 SOS를 보냈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쓰레기통을 집어 들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Throw up here.”
그 타국에서, 밤중에, 초면인 선생님 앞에서 구토라니. 정말 싫었지만 구역감을 참을 도리가 없었다. 같이 간 동료를 검사실 밖으로 내보내고 한바탕 구토를 한 후 피를 뽑아 말라리아 검사를 받았다. 그때부터 울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솟았던 것 같다. 잠시 후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다정한 말투로 결과를 알려 주셨다.
“Malaria positive.”
양성 판정을 받자 여러 증상들이 기다렸다는 듯 아주 힘껏 나타났다. 말라리아는 사람마다 증상이 다 다르다고 하던데, 내 경우에는 구토 증세가 심했다. 토를 너무 많이 한 탓에 목소리가 다 쉴 정도였다. 고열과 오한 역시 너무 심해서 눈 앞이 말 그대로 팽팽 돌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겨울과 여름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두통과 관절통도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겪어본 사람만 안다. 인류 역사상 사람을 죽음으로 가장 많이 내몬 게 모기라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이후 며칠 내내 병원을 오가며 링거를 맞았다. ‘You will survive, dear’라며 위로해주는 간호사 선생님 손을 잡고.
사무소 동료들도 당연히 내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말라리아가 아닐 거라던 그 동료를 포함해서. 그는 본인이 한 말은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내 소식을 듣자마자 말라리아 특효약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팩 주스다. 망고맛, 사과맛, 혼합과일맛…. 당분과 수분을 동시에 보충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이라 썩 신뢰가 가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모든 걸 다 토하던 상황이었기에 뭐라도 마셔야 했다. 무엇보다 달달한 주스를 마셔줘야 토할 때의 기분이 한결 나았다. 그 후로 그 동료뿐만 아니라 현지 직원들까지 모두 약속한 것처럼 부지런히 주스를 사다 주었다. 여러 브랜드, 다양한 맛으로. 평소에는 끈적이는 단맛이 싫어 손도 안 대던 팩 주스, 특히 망고맛 주스를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정신이 몽롱했던 터라 이때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어쨌거나 동료들이 사 나르는 주스로 내 몸을 채우는 동안 점차 구토가 멈추고 열이 내리면서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다. 그때는 구토 때문에 약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으니, 나를 낫게 한 건 아마도 동료들이 사준 그 주스들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팩 주스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아픔과 외로움에 홀로 베갯잇이 푹 젖도록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던 밤. 링거 주사를 맞느라 시퍼렇게 멍들었던 양 손등과 팔뚝. 5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조금 서러워지는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또 다른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다. 내가 다시 이 ‘모기 위험국’에 나올 수 있었던 건, 그때 마셨던 수많은 주스 덕분이 아닐까? 또다시 눈물 젖은 밤을 보내게 된다 할지라도 팩 주스를 종류별로 사다 줄 동료들을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아니까. 그들로부터 이 일을 계속해 나갈 힘을 얻고 위로받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동료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구토, 고열, 오한, 관절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는 걸 안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지도. 그들 모두에게 망고주스를 한 팩씩 선물하고 싶다. 동시에 ‘나는 내 동료들에게 한 팩의 망고주스만큼 힘이 되는 동료일까’를 자문해 본다. 적어도 말라리아 일리가 없다며 동료의 아픔을 과소평가하는 동료는 아니기를.
마지막으로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그’ 동료에게 진심으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 힘든 곳에서 동고동락을 함께 했기에 나에겐 참 특별하고 감사한 동료다. 그러고 보니 못 만난 지 한참 되었다. 한국에 들어가면 꼭 그를 만나야지. 함께 그때 이야기를 안주 삼아 망고주스 한잔 하며 말라리아와, 뎅기와, 황열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동료들을 위해 치얼쓰!를 해야겠다.
글 김세진
그림 이유연
편집 좋은 일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