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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일 하시네요 Aug 24. 2020

커피 한 잔의 차이

좋은 일 하시네요


얼마 전 폭우가 쏟아지던 날, 나는 면접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면접을 무서워하는데, 심지어 이 기관에 제안하는 사업 면접은 처음이라 더 무서웠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이 공모의 경쟁률이 높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고, 저 문 뒤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설득과 증명을 해내야 하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 나는 진한 마키아토 한잔이 생각났다. 자그마한 잔에 커피 얼룩이 여기저기 찍힌 우유 거품이 가득한, 마시면 우유 구름 뒤로 쨍한 커피 맛이 나는 에티오피아의 그 마키아토가 마시고 싶었다. 그걸 마시면 이 면접도 든든한 마음으로 잘 할 수 있을 거란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쉬운 대로 온수 버튼 대신 ‘미온수’ 버튼이 있는 정수기에서 미적지근한 물을 받아 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카페에 가면 항상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는데, 마지막으로 마키아토를 마셨던 날에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작년 12월이었고, 에티오피아 오로미아 주(州) 어느 소도시 관청 앞 카페였다. 일과 시작 전 여유롭게 차 혹은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속에서 나와 사업 매니저님은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 앉아 우리 사업의 담당 공무원 A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겐 약 2주 정도의 출장 기간 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우선 이 A씨를 만나 설득하고 어떤 허가를 받아야만 뭐라도 해볼 수 있는 형편이었다. A씨는 워낙 자리를 자주 비우고, 그간 우리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람이라 미리 잡아두었던 약속은 벌써 펑크가 난 상태였고, 시간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오늘은 무조건 만난다는 각오를 다지며 아침부터 관청을 찾아갔다.


이 일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가끔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을 내가 맡는 것이 맞나 싶고 버거울 때가 있는데, 이날의 압박감은 단연 절정이었다. 어쨌든 ‘담당자’는 나고 달리 누가 가겠나 싶어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오겠노라 비장하게 결의하며 출장길에 올랐다. 하지만 인천에서 이륙하는 비행기에서부터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무섭게 느껴졌고, 도착해서는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당연히 예상 못 한 변수가 생기겠지' 했던 예상을 넘어서는 예상 밖 변수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매일 임기응변의 춤을 추며 일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어쨌든 이날은, 혹시 A씨가 일찍 출근했다가 다른 회의에 가버리기 전에 붙잡자는 생각으로 관청이 여는 시간에 맞추어 A씨의 사무실로 갔다. 하지만 역시나 A씨는 출근 전이었고, 나는 A씨와 빨리 담판을 하고 싶기도 하고, 또 막상 하자니 두려운 마음이 들어 그가 오지 않았으면 싶기도 한 심란한 상태로 사무실 앞을 서성이다가, 일단 뭐든 따듯한 거 한잔 마시면서 생각해야겠다 싶어서 매니저님과 근처 카페로 갔다.


한국에서 업무 시간에 커피나 차를 마시는 일은, 예를 들어 보고서를 쓰면서 커피를 마신다든지, 회의하면서 차를 마신다든지, 이렇게 다른 일에 붙어 따라가는 경우가 많지만, 현장에서는 업무 시간 내라도 커피나 차를 마시는 일 그 자체가 주된 일이 될 때가 많았다. 출근해서 아침 겸 티타임 겸 허기를 달랠 때, 혹은 누군가가 약속 시각에 늦거나 내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 시간이 뜰 때,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야 할 때, 커피나 차이(스와힐리어-Chai, 르완다어-Icyayi, 혹은 암하라어-Shay, 향신료가 들어간 홍차)를 한 잔씩 마셨다. 받침 위에 예쁘게 얹혀 나오는 찻잔부터 엄지와 검지에 착 감기는 크기의 에스프레소 잔, 오래되어 너덜너덜한 플라스틱 컵 등 형형색색 개성 있는 잔에 담긴 따듯한 음료를 홀짝이면 몸이 따듯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지곤 했다. 거기에 동료와 혹은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아니 하다못해 눈썹 인사라도 하게 되면 만성적인 외로움도 잠시 가시는 기분이 들어 참 좋았다. 탄자니아와 르완다에서 쌓인 습관과 경험은 이날의 나를 카페로 이끌었다.


평소 우유가 들어간 음료를 잘 먹지 않지만, 이미 스트레스로 속이 쓰릴 만큼 쓰렸던 나는 분나(Bunna, 에티오피아 커피)를 속에 부을 자신이 없어 마키아토를 주문했고, 평소 마키아토를 잘 마시던 매니저님은 배가 아프고 몸이 좋지 않다며 차이를 주문했다. 몇 분 뒤, 주문한 마키아토가 나왔는데, 내가 에티오피아에서 마신 그 어느 마키아토보다도 멋지고 맛난 마키아토였다. 우유 빙수처럼 소담하게 쌓인 거품 아래로 살짝 보이는 커피 얼룩, 거기에 반짝이는 설탕을 두어 스푼 넣어 마시니 맛도 부드럽고 향긋했다. 아마 부슬부슬 내리던 비와 습기를 머금은 아침의 묵직한 공기, 시원한 바람, 그리고 묘하게 사이즈가 작아 불편하면서도 약간 쪼그린 자세가 되어 안정감을 주던 의자도 이날 마키아토의 특별한 풍미에 한몫했을 것이다.



마키아토 건너편의 매니저님은 우리 뒤엔 우리와 함께하는 커뮤니티가 있고, 특히 '우'가 한국에서 왔으니 잘 풀릴 거라고 말했다. 과연 ‘우’의 물리적 존재가 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큰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매니저님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담감에 몸서리쳤는데, 이날은 조금 달랐다. 일단 마키아토가 내 속을 따듯하게 채우고 있었고, 이 문제로 오랜 기간 가장 많이 시달렸던 사람이, 그날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은 와중에도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누구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지, 그래서 어떤 희망이 있는지 말하는 것을 들으니 새삼 진정성이 느껴지고, 내 뒷배도 꽤 든든하구나 싶어 용기도 생겼다.



아무튼, 시간이 꽤 지나도록 A씨가 출근하질 않아서 우리는 늘 그렇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아무렇게나 잡히는 잡담을 하다가, 마침내 그가 사무실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각자 반쯤 남은 마키아토와 차이를 털어 넣고 올라가 A씨에게 힘차게 인사를 건넸다. "앗캄 젤타!“(Akkam Jirta, 오로모어 인사말) 그렇게 우리는, 매니저님 표현을 빌리자면, ”Things were nicely finished“ 되도록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마키아토와 무관하게 해결될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해결 과정의 ‘나이스’함은 분명 나의 커피 한잔과 매니저님의 차이 한잔이 만들어낸 작지만 큰 차이였다. 이 일 이전에도 그랬듯, 이후로도 무서운 일들, 막막한 일들은 많기에,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혹은 함께하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삶의 ‘나이스’함을 위해.


”일단 따듯한 거 한잔 마시고 시작할까요?“ 호로록.




     우승훈,국제개발협력 일을 통해 아프리카에 대한 덕심을 채우는 아프리카 덕후입니다. (https://brunch.co.kr/@theafricanist)

    그림 이유연

    편집 좋은 일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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