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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예언, 치유 등의 은사가 위험한 이유

[궁금했성경] 82화, 은사는 구원의 길을 가릴 수 있다

by 허두영

1. 서론 - 불꽃은 남았으나, 빛은 사라졌다


주말 저녁, 어느 대형 집회 영상. 스피커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금 불이 임합니다!"를 외치고, 화면 아래 채팅창은 불꽃 이모지로 번쩍인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불꽃은 확실히 보이는데, 빛은 어디에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본래 교회를 비추는 빛의 반사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반사판이 주인공 노릇을 한다. 방언을 못 하면 2% 부족한 신자 취급받고, 예언을 못 들으면 하나님이 말 걸지 않는 목회자처럼 보인다. 불꽃은 뜨겁지만 정작 성경의 빛은 흐릿하다. 문제의 본질은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복음이 중심이냐 아니냐다.

은사는 위험하지 않다. 복음 밖의 은사가 위험할 뿐이다. 그리고 구원의 관점에서 말하면, 차라리 은사는 안 받은 게 낫다. 은사가 복음으로 가는 길을 막아서기 때문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 은사의 역사적 변질사 - 불꽃이 불길로 바뀌다


2세기 몬타누스 운동은 '새 계시의 시대'를 외치며 성령의 음성을 성경 위로 끌어올렸다. 계시의 완결성(계 22:18)을 흩뜨린 첫 불길이었다. 처음엔 열심이었으나 곧 공동체는 혼란의 늪에 빠졌다. 12~14세기 중세 신비주의는 '신인 합일'의 황홀경이 복음을 대신했다. 하나님을 더 느끼려다 결국 내가 곧 신이 되는 위험에 빠졌다(롬 1:25). 17~18세기 청교도와 감리교 일부는 회심의 감정을 구원의 표준으로 삼았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점차 '내가 느낀 무엇'으로 대체되었다(엡 2:8~9).


1906년 오순절 운동에서 방언=성령세례라는 등식이 고착되었다. 표적이 복음의 전부처럼 커졌고, 못 하는 자는 '미달 신자'라는 낙인이 생겼다. 1980년 신사도 운동은 사도, 선지자의 권능을 재가동하며 인간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말씀의 권위를 압도했다(고전 4:7). 2000년 이후 현대 한국 교회에선 느낌=임재, 현상=증거라는 공식이 일상화되었다. 은사는 불꽃처럼 시작하지만, 복음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불길이 되어버렸다. 공식은 이렇다. 복음 → 은사 → 체험 → 교만 → 혼돈 → 타락. 이는 역사서가 아니라 성경이 이미 경고한 시나리오다(마 7:22~23).


3. 현대 교회의 은사 혼란 - 체험의 신앙이 복음을 밀어냈다


체험 중독에 빠진 오늘의 한국 교회. 현장에선 세 가지 현상이 눈에 띈다.

첫째, 방언, 예언이 성령세례의 표준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성령세례는 회심의 순간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은혜다(고전 12:13). 그 증거는 방언이 아니라, 새 생명의 열매다(롬 8:16, 갈 5:22).

둘째, 치유·기적의 상업화다. 간증이 광고가 되고, 체험이 상품이 된다. 애초에 표적은 복음을 확증하는 손가락이었지(히 2:3~4), 복음 자체가 아니었다.

셋째, 지도자 숭배다. '기름 부음'이라는 말 아래 사람의 권위가 부풀어 오르면, 말씀의 권위는 축소된다. 그때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연장으로 전락한다(고전 1:12). 한마디로 정리하면, 복음이 약해진 자리마다 체험이 신이 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다(고전 14:33). 무질서한 불꽃은 성령의 불이 아니다.


4. 신학적 진단 - 은사는 왜 복음 밖에서 위험해지는가


① 체험 중심화: 신앙의 기준이 사실(복음)에서 느낌(체험)으로 이동한다. "느끼지 못하니 불안" → 더 강한 자극을 찾는다. 신앙이 중독의 구조로 기울기 시작한다(요 20:29).

② 구원 확신 왜곡: 방언, 예언이 구원의 증거로 둔갑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성령이 친히… 자녀 됨을 증언하신다"(롬 8:16). 확신의 근거는 외적 기적이 아니라 내적 증거다.

③ 사탄의 흉내: 모세 앞의 애굽 박사들처럼(출 7:11~12) '비슷한 능력'이 항상 존재한다. 예수님도 경고했다.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리라"(마 24:24).

④ 리더십 오용: '은사자'의 말이 성경을 대체한다. 그 순간 은사는 교주의 무기가 된다.

⑤ 사랑 부재: 바울은 고린도서 사랑장(13장)을 끼워 넣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 없는 은사는 소음이기 때문이다(고전 13:1~3).

⑥ 감정 중독: 체험은 강렬하지만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더 센 것을 찾는다. 말씀의 묵상과 순종은 심심한 것이 되고, 마약처럼 점점 더 센 것을 찾게 된다(요 8:31~32).


여기서 한 가지만 분명히 하자. 은사는 빛이 아니라 거울이다. 복음의 빛을 받을 때만 빛난다. 빛이 사라지면 거울은 어둠을 반사한다.


5. 고린도 교회의 교훈 - 은사로 충만했으나 복음은 비어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쓴 편지는 오늘 한국 교회의 자화상 같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는데도"(고전 1:7) 그들은 여전히 "육에 속했다"(고전 3:1~3). 은사가 많아도 성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세 단락으로 교회를 교정했다. 12장에서는 "은사는 다양하지만 근원은 하나이다"라고 했고, 13장에서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14장에서는 "모든 일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라"라고 정리했다. 결국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성령 충만은 흥분이 아니라 절제다. 진짜 능력은 표적이 아니라 삶의 변화다. 고린도는 오늘의 거울이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바울의 진단은 냉혹했다. "아직도 육에 속했다"(고전 3:1~3). 다시 말하지만, 은사가 많아도 성숙하지 않을 수 있다.


6. 가장 궁금한 은사 관련 10가지 질문과 복음적 답변


신자들이 실제로 가장 많이 묻는 열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오해를 벗기고, 복음적 기준으로 정리해 보자.


① 방언을 못 하면 성령세례를 못 받은 건가요?

아니다. 성령세례는 회심의 순간 모든 신자에게 단번에 주어진 은혜다(고전 12:13). 방언은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일 뿐이며,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 아니라 변화다.


② 방언은 천사의 언어인가요, 인간 언어인가요?

고린도전서 13:1의 '천사의 말'은 비유적 표현이다. 사랑이 없는 방언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수사법이지, 실제 언어 구분이 아니다.


③ 예언은 지금도 가능합니까?

가능하다. 하지만 예언은 '새 계시'가 아니라 기존 말씀의 조명과 적용이다. 성경 기록은 이미 완결되었다(계 22:18~19).


④ 치유와 기적의 은사는 사라졌나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목적이 달라졌다. 사도 시대의 기적은 복음을 '기록으로 확증'하기 위한 표적이었다(히 2:3~4). 지금의 치유는 여전히 하나님이 행하신다. 다만 하나님은 사람의 손을 통해 일하시는 주권자이지, 주문을 듣는 요술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⑤ 왜 어떤 사람은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없나요?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선물이다(고전 12:11). 불공평이 아니라 주권적 다양성이다.


⑥ 은사를 구해야 하나요?

은사는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맡겨지는 도구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라는 말도 결국 '사랑'을 가리킨다(13:13). 바울이 말한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였다.


⑦ 방언 통역이 없는데, 왜 다들 방언으로 기도하나요?

고린도전서 14장은 개인의 유익보다 교회의 질서를 우선시한다.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14:28). 공동체 예배에서 방언을 무제한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다.


⑧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라는 표현은 옳은가요?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지만, 철저히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딤후 3:16~17).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순간, 말씀 위로 올라서는 것이다.


⑨ 진짜 은사와 가짜 은사는 어떻게 구분하나요?

참된 은사는 예수를 높이고(요 16:14), 거짓 은사는 '은사자'를 높인다. 참된 은사는 사랑과 성화를 열매로 맺지만(갈 5:22), 거짓 은사는 교만과 분열을 낳는다.


⑩ 은사는 꼭 필요한가요?

교회를 세우는 목적이라면 필요하다. 하지만 구원과는 무관하다! 방언이 없어도, 예언을 못 해도, 구원은 완전하다(벧후 1:3). 하나님은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완성시키신다.


7. 복음 중심 분별의 기준 - 참된 은사와 거짓 은사의 구별


① 출처 - 예수님을 높이는가(요일 4:2–3)? 아니면 체험하는 나를 높이는가?

② 기준 - 말씀 아래 있는가(시 119편)? 아니면 말씀을 넘어서 새로운 말을 더하는가?

③ 질서 - 화평과 절제인가(고전 14:33)? 아니면 흥분과 혼돈인가?

④ 열매 - 사랑, 성화, 겸손인가(갈 5:22–23)? 아니면 교만, 분열, 비판인가?

⑤ 결과 - 교회를 세우는가(엡 4:12)? 아니면 개인을 신격화하는가?


분별의 결론은 명료하다. 은사의 진위는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복음의 방향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구원의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하자. 은사가 없어도 복음은 완전하다(벧후 1:3).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도 된다. "차라리 은사는 안 받아도 된다." 아니 "안 받는 게 나을 수 있다." 오히려 은사를 구원의 증거인양 착각하고, 교만과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결론 - 체험의 불꽃에서 복음의 등불로


성령의 은사는 사도시대에만 머물렀다고 보는 중단론(cessationism)과, 지금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역사한다고 믿는 계속론(continuationism)이 여전히 신학의 두 축처럼 맞서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의 입장을 택하든 분명한 사실이 있다. 성령은 결코 무질서하게 일하시지 않는다. 설령 계속론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은사는 반드시 복음의 질서 아래 통제받아야 한다. 성령은 여전히 교회를 세우시지만, 그 흐름이 인간의 체험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울어질 때, 그것은 이미 성경적 질서를 벗어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령 운동은 “계시의 완성 + 조명의 지속”이라는 복음적 균형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계시는 이미 성경 안에서 완결되었고(계 22:18~19), 조명은 성령이 지금도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지속적 역사이다(요 14:26). 은사는 계시의 도구가 아니라, 조명의 열매여야 한다. 성령의 불은 새로운 계시를 주는 불이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을 밝히는 등불이어야 한다.


교회는 다시 방향을 세워야 한다. 체험보다 말씀을, 리더보다 복음을, 혼돈보다 질서를, 열정보다 사랑을, 능력보다 거룩을 사모해야 한다. 체험은 불꽃이고, 복음은 등불이다. 불꽃은 타오르다 꺼지지만, 등불은 작아도 끝까지 비춘다. 방언이 없어도 괜찮다. 예언이 없어도 괜찮다.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하다. 복음 하나로 충분하다. 그때, 성령의 불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게 타오른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인천성산교회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로128번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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