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86화, 한 사람의 이름이 열어젖힌 인류 전체의 구원 서사
예배 시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한 이름을 읊조린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대목은 참 이상하다. 사도신경은 우주의 기원을 말하고, 창조의 신비를 묘사하고, 인류 구원의 드라마를 한 문장씩 압축해 두었다. 그런데 그 장엄한 고백 한가운데, 웬 지방 총독 하나가 실명으로 박혀 있다. 베드로도 아니고, 바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다.
왜 하필,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인가? 그 이름은 마치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버튼을 눌렀는데, 집 전체의 전등이 갑자기 켜지며 구조가 선명해지는 순간과도 같다. 십자가 사건을 전혀 다른 각도로 열어젖힌다.
초대교회가 사도신경을 만들던 시대는 혼란스러웠다. 온갖 이단이 예수를 '신화 속 인물'로 만들려 덤벼들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는 신적 환영에 불과했다"라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십자가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고 속삭였다. 그때 교회가 꺼낸 카드가 바로, '빌라도'라는 이름 석 자였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를 이렇게 시작한다. "티베리우스 황제 제15년,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눅 3:1). 연호가 박히고, 권력자의 이름이 기입되고, 사건의 위치가 특정된다. 이건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다. 예수의 고난을 '신화적 시간'에서 '역사적 시간'으로 끌어들인 선언이었다. 사도신경이 빌라도를 콕 집어 넣은 건, 십자가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는 걸 박아두기 위해서였다.
예수는 "어딘가에서 고난당한 분"이 아니라, 빌라도가 총독으로 재임하던 특정한 시기,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던 정치적 공기 속에서 실제 재판을 받고 처형되신 역사적 인물이었다. 빌라도의 이름은 그 역사에 찍힌 도장이다.
빌라도는 단순한 증인이 아니라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대 지역 사법권을 쥔 절대 권력자였다. 그의 입에서 '십자가형'이라는 단어가 떨어지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를 죽일 수 없었다.
복음서는 양심과 정치 사이에서 흔들리는 빌라도를 반복해 그린다. 예수가 무죄임을 알았지만(요 18~19장), 폭동이 두려워 군중의 요구를 받아들였고(마 27장), 자신의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그는 진리를 알면서도 외면한 사람, 정의를 보았으나 보신을 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장면이 사도신경에 들어간 이유다. 예수의 고난은 은밀한 살해나 종교적 암투가 아니라, 로마 제국 법정이 내린 공적 판결이었다. 그리고 그 법적 정죄를 예수께서 온몸으로 받으셨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의 구조를 선명하게 해준다. 빌라도의 이름은 바로 그 '법적 실제성'을 보증하는 도장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들어간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십자가 사건을 유대인의 내부 문제로 한정하지 않기 위해서다. 사도행전 4장 27절은 이렇게 증언한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족속이 합하여 거룩한 종 예수께 대적하니라"
이 짧은 한 줄이 십자가의 본질을 꿰뚫는다. 십자가 앞에는 유대인의 대표(대제사장, 산헤드린)와 이방인의 대표(로마 총독 빌라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십자가는 어느 한 민족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가 빚어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구원의 문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활짝 열렸다. 빌라도의 이름은 바로 그 문이 열렸다는 증거였다.
만약 빌라도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십자가는 유대 지역의 종교적 비극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현장에 로마를 세워놓으셨다. 그 죽음이 세계의 사건, 곧 인류 전체를 위한 구속 사건임을 선포하시려고. 그 이름 한 줄 덕에, 혈통적으로 이방인이었던 우리 같은 존재도 그 구원의 장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우리는 안다. 왜 사도신경이 그 많은 이름 중 딱 한 사람의 이름, 본디오 빌라도를 기록했는지. 십자가는 신화가 아니라 실제 사건임을 선언하는 역사성, 예수님의 죽음이 법적 판결에 따른 공적 정죄였음을 증명하는 법정성, 십자가가 유대인의 사건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임을 드러내는 보편성. 이 세 개의 기둥이 하나로 모이면, 사도신경은 단 한 줄로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기록된 시간 속에서, 법정의 판결 아래, 온 인류를 대신해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 이름을 고백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 고백은 빌라도를 높이려는 게 아니다. 그 이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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