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92화, 초대교회에서 개혁교회까지 기독교를 지킨 신앙고백들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까지, 혼란과 논쟁이 휘몰아칠 때마다 교회는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그 고백들이 쌓여 기독교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 우리가 딛고 선 땅이 되었다. 기독교의 2천 년을 관통하는 신앙고백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첫째,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확정한 초대 교회의 3대 신앙고백이며, 둘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주의를 세운 6개의 신앙고백이다. 이 아홉 개의 문서를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된다. 신학이란 책상 위의 문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다는 것을.
1) 사도신경 - 신앙의 뼈대
사도들이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집약했다는 의미에서 '사도신경'이라 불렸다. 세례와 예배에서 쓰이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뼈대'가 되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은 느낌이 아니라 고백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2천 년 동안, 개혁교회는 물론이고 모든 개신교가 이 고백을 예배의 중심에 두었다.
2)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 '예수는 하나님인가?'
325년 니케아 회의는 한 가지 질문으로 소집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인가, 혹은 피조물인가?"
아리우스파는 예수를 '뛰어난 피조물'이라고 했다. 만약 그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십자가의 구속은 통째로 무너졌을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성령의 신성까지 확정되며 삼위일체 교리는 완성되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성부-성자-성령'은 이 고백 위에 서 있다.
3) 칼케돈 신경 - '그렇다면 예수는 사람인가?'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그가 흘린 눈물과 피는 뭔가? 예수는 신성만 있는가, 아니면 인성만 있는가? 451년 칼케돈 회의는 이렇게 항변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혼합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은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다." 십자가가 실제가 되려면, 예수는 반드시 '피 흘릴 수 있는 인간'이어야 했다. 이 한 문장은 기독론의 기준이 되어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세 고백은 결국 하나의 질문에 답했다. "예수는 누구인가?"
4) 제네바 신앙고백(1536) - 개혁교회의 출발점
칼뱅과 파렐은 <기독교 강요>를 바탕으로 21개 조항의 신앙고백을 제네바 시의회가 이를 채택했고 제네바 시민에게 제시했다. 믿음을 단지 개인의 소신이 아니라 사회적 고백으로 만든 첫 시도였다. 이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혁은 생각이 아니라 삶 전체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개혁파는 조직과 신학을 갖춘 '교회'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5)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 신앙이 국가의 방향을 바꾸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아버지, 스코틀랜드의 칼뱅으로 불리는 존 낙스와 동료들은 가톨릭의 권위 대신 성경의 권위로 국가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는 국가 차원의 신앙고백을 채택한다.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라의 방향이 될 수 있다." 이 고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등장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표준이었다.
6) 벨직 신앙고백(1561) - '우리는 이단이 아니다'
당시 네덜란드·벨기에 지역을 '벨기카'라고 불렀다. 오늘날 'Belgium(벨기에)'가 아니라 당시 라틴어로 Belgica, 네덜란드·벨기에 일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핍박받던 개혁파가 "우리는 반역자나 이단이 아니라,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변호하려고 쓴 고백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신앙고백이라 하여 벨직(벨지크)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이 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박해받던 개혁파는 자신들이 급진적 분파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에 더 충실하다는 걸 알리려고 이 고백을 썼다. 박해 속에서 태어난 이 문서는 훗날 도르트 총회에서 공식 채택되어 개혁교회의 표준 3대 문서 중 하나가 된다. 이 고백은 신학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용기'였다.
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 - 가장 따뜻한 교리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우르시누스와 궁중 설교자 올레비아누스가 만든 문답식 요리문답이다. 처음 질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을 만큼, 네 삶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답은 단호하면서도 아름답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오직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개혁주의 교리는 차갑지 않다. 이 문서가 지금도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청소년 교육에 쓰이는 이유다. 교리는 암기가 아니라, 위로와 확신이 될 수 있다는 증거다.
8) 도르트 신조(1618~19) - 은혜를 지켜낸 투쟁
아르미니우스파는 구원이 인간의 선택으로 결정될 수 있다고 했다. 도르트 총회는 여기에 이렇게 응답한다. "구원은 인간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시작한다." 그 유명한 TULIP 예정론은 이 논쟁의 결과물이었고, 개혁주의 구원론의 기준이 되었다. 신앙고백은 싸우기 위한 게 아니라 은혜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방패였다.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 - 개혁교회의 구조를 완성하다
고백은 신학자 121명과 상·하원 의원 30여명을 소집해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의 헨리 7세 채플과 인근 회의실에서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7개월, 1163번의 회의 끝에 나온 문서 중 하나다. 예배, 정치, 성경, 윤리, 삶… 개혁교리 전체를 가장 완전하게 정리했다. 여기서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이 함께 작성되었고, 지금 장로교회의 표준 문서가 된다. 이전 신앙고백들은 대부분 교리 논쟁의 해결에 초점을 두었지만, 웨스트민스터 문서는 교회 전체 ‘설계도’를 만든 문서였다. 이 문서를 통해 '신학'에서 '교회'로 완성되었다.
9개의 신앙고백은 과거의 교리 요약집이 아니다. 교회가 숨 쉬던 순간들의 기록이다. 논쟁이 있을 때마다, 교회는 피하지 않고 묻고 또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그리고 그 답을 문장으로 남길 때, 교회는 다시 살아났다. 9개의 신앙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앙은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말'로 존재할 때, 비로소 삶이 된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힘 있는 말'일지 모른다.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인천성산교회 유튜브: www.youtube.com/@인천성산교회인천이단
인천성산교회 고광종 담임목사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midnote924
인천성산교회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 장아산로128번길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