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93화, 고린도전서 2~3장으로 나를 거울 앞에 세워보다
주일 아침, 같은 교회 의자에 앉아 있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믿음이 흐른다. 어떤 이는 찬양 중 눈시울을 적시고, 어떤 이는 설교의 논리만 분석하며, 어떤 이는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모두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이 믿는 신앙은 서로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3장에서 이 사실을 정확히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지만, 신앙의 모습은 셋이라고. 육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 신령한 자. 바울이 제시한 이 세 가지 유형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 신앙을 진단하는 청진기에 가깝다. 코로나 진단키트가 바이러스를 가려냈듯, 이 구분은 우리 안에 잠복한 '신앙의 바이러스'를 확인해준다.
고린도는 무역이 번성했고, 사람은 많았고, 언어는 화려했고, 웅변술이 경쟁력으로 작동하던 도시였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과 놀랍도록 닮았다. 빠르고, 화려하고, 비교가 일상인 곳. 사람은 많지만 깊이 있는 신앙은 찾기 어려운 곳.
교회 역시 그랬다. 은사와 체험은 넘쳤지만, 복음의 뿌리는 얕았다. 바울은 그 교회의 깊은 문제를 이렇게 꿰뚫는다. "문제는 사람이다. 성숙하지 않은 신앙은 어떤 은사도 감당할 수 없다."
바울은 예배부터 인간관계까지 뒤틀린 교인들을 세 종류로 나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만 해당하는 진단이 아니다. 우리 시대,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적용되는 진단이다.
성령 없이 종교를 '소비'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은 똑똑한 사람의 책이 아니라, 성령이 임재해야 읽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상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성령의 일’이란 십자가의 복음을 ‘나의 사건’으로 믿게 하고, 그 복음이 오늘의 삶을 재편하게 하는 능력이다. 교회를 다닐 수도 있다. 성경 공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기독교는 문화, 도덕, 자기개발일 뿐이다. "예수만이 길이야?", "신은 많잖아. 왜 꼭 예수여야 해?", "종교는 위로와 평안을 주면 되는 거 아닌가?" 성경은 읽지만, 복음은 들리지 않는다. 말씀은 연구하지만, 죄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뒷전이다. 이들은 교회 안 의자에 앉아 있지만, 성령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성령은 있으나, 성령의 지배는 받지 않는 유형이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른다. 즉 구원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진단한다.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이다. 아직 육신에 속해 있다."(고전 3:1~3)
이 사람들은 구원은 받았으나 어린 아이 신앙인 자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직분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은 여전히 "내가 존중받고 있는가?"이다. 복음보다 상처, 말씀보다 섭섭함, 공동체보다 나의 자존감이 더 앞선다. 이들은 사랑을 받고 은혜도 체험한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 속마음은 이렇다. "하나님보다 지금은 '내 감정이 먼저'다." 신앙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단계다.
복음으로 세상을 보고, 복음으로 살기 시작한 사람이다. 바울은 말한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분별하나,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전2:15)
이 사람은 특별한 체험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방향이 복음으로 정렬돼 있다. "나는 지금 복음의 방향으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문제를 통해 나를 무엇으로 빚고 계실까?", "이 일터는 내가 먹고 살기 위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선교지일 수 있다."
성령께서 말씀과 삶 사이의 간격을 줄여 주기 시작한다. 기도는 요구가 아니라 관계가 되고, 일은 생존이 아니라 소명이 된다. 신앙은 이제 감정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
다음의 문항으로 스스로 신앙의 상태를 진단해 보자.
① 나는 예수의 십자가를 '절실한 현실'로 느끼는가, 아니면 '많은 선택지 중 하나'로 보는가?
육에 속한 자는 복음이 '진짜'가 아니라 '가능성' 정도로 들린다. "예수만이 구원이다"라는 말이 과격하게 들린다면, 아직 '복음의 세계'가 아닌 '종교의 관람석'에 앉아 있는 것이다. "예수만이 길이다"라는 말이 내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는가?
② 나는 설교를 듣고 감동하지만, 실제 선택은 여전히 '내 감정'이 결정하지 않는가?
육신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알지만, 감정에 끌려 산다. 바울은 이것을 ‘시기와 분쟁’(고전 3:3)이라 불렀다. 주일에는 "아멘"이었는데, 월요일이 되면 또 다른 기준이 작동한다.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아", "내 기분부터 챙겨야지" 낯익지 않은가? 위로받고 싶을 땐 성경을 찾지만, 결정을 내릴 땐 세상의 잣대를 찾지 않는가?
③ 구원은 믿지만, 인생의 방향은 여전히 '성공, 안정, 평가'가 기준이 되지 않는가?
"믿음은 있는데 사고방식이 달라지지 않았다"라는 것이 육신에 속한 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신앙은 늘 있지만 삶의 방향은 전혀 재편되지 않았을 수 있다.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닮아가느냐"가 중요해졌는가? 결정의 순간, 나는 복음을 기준으로 삼는가? 그렇지 않다면, 신앙은 '정체성'이 아니라 아직 '옵션'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④ 나는 지금 신앙이 자라고 있는가, 아니면 같은 자리를 반복하고 있는가?
신앙은 정체되면 반드시 왜곡된다. 멈추는 순간, 신앙은 자기중심적 종교로 변한다. 몇 년째 구원받은 감격만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미 성장은 멈춘 것이다. 말씀을 더 많이 알지만, 내 성품의 온도는 그대로인가? 기도는 깊어졌는데, 사람을 향한 태도는 거칠어지지 않았는가? 이것은 지식은 늘었지만, 복음은 자라지 못한 상태다.
⑤ 나는 예수를 믿는가, 아니면 믿고 싶은 '나'를 믿고 있는가?
가장 위험한 형태는 기독교의 언어로 포장된 자기 확신이다. "나는 오래 다녔으니, 헌신도 했으니, 믿음 있는 사람이다." 고린도 교회의 핵심 문제는 이 확신이 복음이 아닌 자기 이미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신앙의 목적은 '내가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복음은 ‘자기 긍정’이 아니라 ‘자기 해체’에 가깝다.
신앙은 예수를 믿는다는 종교적 고백이 아니라,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실존의 여정이다. 육에 속한 신앙은 복음을 몰라서 멀고, 육신에 속한 신앙은 복음을 알아도 살지 못하며, 신령한 자만이 복음으로 살아낼 수 있다. 바울의 마지막 외침이 이 글의 결론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후 13:5) 예수를 믿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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