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했성경] 97화, 확신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자란다
평생을 교회에서 보낸 사람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여전히 이렇게 묻는다.
"나는… 정말 구원받았을까?"
예배당 안엔 두 종족이 산다. 확신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과 흔들리기 때문에 확신을 말 못 하는 사람. 겉으로는 똑같이 찬송을 부르는데, 속마음의 온도는 북극과 적도만큼 다르다. 이 글은 후자를 위한 것이다. "조금 기도 더 하고, 더 열심히 믿으면 괜찮아질 거야" 같은 달콤한 거짓말이 아니라, 복음의 구조 자체를 다시 꿰매는 진단을 해보려 한다.
우리는 보통 죄를 떠올릴 때, "오늘 짜증낸 것, 어제 거짓말한 것, 그때 하지 말 걸 했던 그 말…"을 생각한다. 이건 죄의 일부만 본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자범죄다. 내가 실제로 지은 죄, 앞으로도 지을 죄들. 하지만 성경은 한 가지를 더 말한다. 원죄다. 아담이라는 인류의 대표가 넘어질 때 우리도 함께 넘어진 그 죄, 다시 말해 지옥의 법적 근거(롬 5장). 자범죄는 회개로 매일 해결받아야 하지만, 원죄는 오직 단 한 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해결된다.
문제는 많은 신자가 평생 자범죄만 붙잡고 씨름하면서, "내가 회개를 충분히 했나, 마음이 진짜였나"만 검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의 확신 따윈 생길 리 없다. 원죄가 정리되지 않았으니, 영원한 심판의 법정은 여전히 열려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원죄는 복음으로 단번에, 자범죄는 회개로 날마다." 이 두 줄이 정리되는 순간, 확신의 문이 스르륵 열린다.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밤을 상상해보자. 이스라엘 진영에는 세 유형의 사람이 있었다. 첫째, 피를 믿지 않고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사람. 둘째, 피를 바르고도 "혹시 안 되면 어쩌지" 하며 떨고 앉아 있던 사람. 셋째, 피를 바르고 "하셨다니까 되겠지" 하고 눕자마자 코 골며 잤던 사람. 감정은 셋이 다 달랐지만, 결과는 둘로 나뉘었다.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심판이 임했고, 피가 발린 집은 모두 넘어갔다(출 12:13).
하나님은 그 밤에 감정의 온도계를 들여다보지 않으셨다. 오직 한 가지만 보셨다. "피가 있느냐, 없느냐." 우리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유월절의 기준을 알고도,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요즘 은혜가 안 돼서, 확신이 잘 안 느껴져."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확신은 느낌의 온도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피의 근거 위에서 나온다.
사도 요한은 신앙의 심리를 해부학자처럼 정확히 꿰뚫어보고, 아예 구절 하나를 확신의 설명서로 남겼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이 한 문장엔 세 개의 핵심이 숨어 있다. 첫째, 이 말씀은 믿는 자에게 주신 것이다. 둘째, 말씀을 기록한 목적 자체가 '확신을 주려는 것'이다. 셋째, 영생은 느껴보는 것이 아니라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확신은 "오늘 내가 얼마나 뜨거운가?"로 평가하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에 듣고 순종하는 영역이다. 확신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말씀 앞에 서는 자세의 문제다. 영생의 확신은 복음을 듣고 믿을 때 갖게 된다.
에베소서 2장은 믿음에 대한 인간의 착각을 정면으로 박살낸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는 여전히 믿음을 이렇게 착각한다. "내가 끝까지 잘 붙들어야지.", "내 믿음이 약해져서 큰일이야.", "내 믿음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니, 구원이 진짜 맞나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내가 만들어내는 심리 상태로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내가 쌓아 올린 종교 근육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십자가 위에 발을 디디는 행위다. 내 믿음의 품질을 검사하는 삶은 끝이 없다. 복음은 이렇게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꾼다. "내 믿음이 충분한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충분한가?"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구원의 안전성을 이중 잠금 장치처럼 설명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우리는 늘 이렇게 상상한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꼭 붙들고 있어야 안 떨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정반대다. "네가 나를 붙든다"가 아니라, "내가 너를 붙든다." 그것도 아들의 손에 한 번, 아버지의 손에 또 한 번. 이보다 더 안전한 구조가 있을까.
요한복음 1:12은 이 구조를 이렇게 요약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자녀는 부모의 그날 기분으로 출생신고가 취소되지 않는다. 구원은 감정이 아니라 신분이다. 디도서 1장2절 이 신분의 철옹성을 이렇게 못 박는다.
"영생의 소망은 거짓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 확신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불분명해서가 아니다. 거짓말 못 하시는 분의 약속보다, 출렁이는 내 감정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섬세한 구분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이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기쁨'을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죄를 지으면 양심은 무뎌지고, 기도는 막히고, 찬양은 메마른다. 시편 51편에서 다윗도 이렇게 울부짖는다.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여기서 다윗은 "구원을 다시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구원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구원 자체'가 아니라 '구원의 기쁨'이었다. 확신은 보존의 영역, 기쁨은 성화와 회복의 영역에 속한다.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죄 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죄는 구원을 취소하는 사건이 아니라, 복음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초대장이 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감정의 온도를 신앙의 척도로 삼고, 말씀보다 기분을 더 믿고, 믿음을 또 하나의 행위로 만들고, '붙들고 계신 손'보다 '놓칠 것 같은 내 손'을 더 의식하고,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기쁨을 뒤섞어버렸기 때문에 영생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원죄는 십자가로 단번에, 자범죄는 회개로 날마다. 확신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기쁨은 행위에서가 아니라 은혜에서.
영생의 확신은 "언젠가 내가 도달해야 할 경지"가 아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선언된 하나님의 결론에 조용히 고개 끄덕이는 순간 시작된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에서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셨으니, 그렇습니다"로 옮겨가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확신의 자리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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