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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사람의 이력 대신, 속사람의 사명을 붙들라

[궁금했성경] 99화, 내세는 죽은 뒤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결정된다

by 허두영

1. 겉사람의 비명과 속사람의 침묵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겉사람 상태 점검에 들어간다. 체중, 피부결, 계좌 잔고, SNS 알림, 이메일 숫자. 하루 에너지는 온통 이 '겉사람'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유지하는 데 쏟는다. 회사에서 듣는 "요즘 어때요?"라는 그 흔한 질문에도, 우리 답은 늘 '일'과 '돈'과 '바쁨'이라는 겉사람의 언어만 맴돈다. 누구도 감히 묻지 않는다. "당신의 속사람은, 요즘 괜찮으신가요?"


이상한 일이다. 우울과 불안, 번아웃은 겉보기엔 가장 멀쩡하고 성과 좋은 사람들에게 더 자주 찾아온다. 사회적 이미지는 빈틈없이 관리되는데, 막상 내면의 자기혐오는 더 깊어만 간다. 화려한 SNS의 불을 끄고 새벽에 홀로 누우면, 문득 섬뜩한 질문이 스친다. '이렇게 살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질문이 바로 속사람이 보내는 비명이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겉사람의 생채기엔 즉각 반응하며 온갖 처방을 쏟아내지만, 정작 중요한 속사람의 신호엔 침묵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암묵적 침묵을 깨며, 생경하지만 근본적인 선언을 꺼내 든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지금 당신의 삶에서 더 빠르게 낡아가는 쪽은 어디인가? 겉사람인가, 아니면 그 안에 갇혀버린 속사람인가? 이 질문이 당신을 영원의 문턱으로 이끌 것이다.


2. 성경적 인간 해부학, 겉사람과 속사람


심리학 교과서의 복잡한 용어 대신, 성경은 예리한 칼로 인간을 단 두 가지로 해부한다. 겉사람(outer man)과 속사람(inner man)이다. 겉사람은 단순히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몸, 감정, 자존심, 스펙, 사회적 이미지, 세상의 온갖 기준이 뒤엉켜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나'의 총체다. 반면, 속사람은 추상적인 '영혼' 그 이상이다. 성경이 말하는 속사람은 복음으로 새로워진 존재, 성령이 거하시는 자리,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새로운 나'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 7:22)


겉은 여전히 비틀거리고 넘어지는데도, 말씀에 대한 기쁨과 끌림이 생겼다면 그것은 단순히 심리적 안정이 아니다. 바로 속사람이 복음으로 살아났다는 증거다. 에베소서에서 속사람은 감상적 개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단련되고 강건하게 되어야 할 실체로 제시된다. 우리가 겉사람을 위해 스펙이라는 이력서를 쓸 때, 하나님은 숨겨진 속사람을 보시고 영원한 사명을 맡기신다. 인간은 '보이는 나'로 우리를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숨은 나'를 보시고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3. 내세는 '죽음 후'가 아닌 '지금'의 결정


속사람의 운명, 곧 내세는 언제 결정되는가? 우리는 종종 "죽으면 알겠지."라고 미룬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경고한다. "아니, 너무 늦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지금'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 미래의 언젠가가 아닌,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못 박는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음은 기회가 연장되는 '쉬는 시간'이 아니라, 답안지를 걷어 가는 '확인의 순간'이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장)는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겉사람의 풍요에만 집중했던 부자는 죽은 후에야 속사람의 처참함을 깨달았지만, 이미 선택의 기회는 끝났다. 내세의 운명은 죽은 후에 고민하면 이미 늦다. 겉사람이 살아 숨 쉬는 동안, 복음에 반응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는 지금 결정해야 하는 현실이다.


4. 원죄와 자범죄, 구원과 현세의 두 겹 구조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가? 성경은 죄를 두 겹으로 설명한다.


원죄(Original Sin) -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법적, 존재적 문제

자범죄(Actual Sin) - 내가 매일 생각, 말, 행동으로 짓는 현세적 죄


내세, 즉 영원한 운명은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은 이 원죄 문제를 완전히 끝냈다는 선언이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것은 50%의 도움이나 부분적 해결이 아니라, 원죄라는 법적 문제를 단번에 종결한 것이다. 내세는 오직 "나는 아담 안에 머물러 있는가,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졌는가?"의 문제다.


반면, 구원받은 성도가 매일 부딪히는 현세의 혼란, 관계의 갈등, 내면의 무너짐은 대부분 자범죄 때문이다. 구원은 받았지만, 욕망을 잘못 풀고, 미움과 비교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보다 돈과 인정에 더 안전함을 느낄 때 우리의 삶은 부서진다. 겉사람이 살아있는 지금, 우리는 이 두 층을 나눠봐야 한다. 원죄는 복음으로, 자범죄는 회개와 순종으로 해결될 때, 우리의 삶은 현세와 내세에 걸쳐 다시 서게 된다.


5. 내세는 '죽은 뒤'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 결정된다


우리는 지금 겉사람의 이미지 관리에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속사람의 영원한 방향 점검에 집중하고 있는가? 다시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돌아가 보자. 겉사람이 세월 앞에 늙고 약해지고 무너지는 것은 신앙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가 겪는 길이다. 진정 두려운 것은 겉사람이 낡아지는 동안, 속사람은 전혀 자라지 않는 것이다. 눈가의 주름은 깊어지는데 속사람의 시선이 여전히 세상의 '스펙'과 '이력서'만 보고 있다면, 그건 단순히 나이 든 것이 아니라 영혼이 늙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겉사람이 약해지고 무너지는 순간에도 속사람이 말씀을 붙들고, 복음 안에서 자신을 재해석하며 하나님을 조용히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는 이미 영원의 문턱 앞에서 강건하게 연습 중인 사람이다. 내세는 죽음 이후의 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은혜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성경의 선언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속사람을 위해 어떤 투자를 하고 있는가?" 영원은 막연한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겉사람이 살아 있는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속사람의 방향을 어디로 정했는지에 따라 이미 시작되고, 결정적으로 정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허두영 작가


현) 인천성산교회 안수집사, 청년부 교사

현) 데이비드스톤 대표이사 / 요즘것들연구소 소장


인천성산교회 홈페이지: http://isungsan.net

인천성산교회 l 인천이단상담소(상담 및 문의): 032-464-4677, 465-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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