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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주 Aug 16. 2018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척 클로즈(Chuck Close)의 <Big Self-Portrait>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속단한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심지어 예술 작품조차도 말이다.     


     

어떤 사람과 오랜 시간 경험해보지도 않고 이야기조차 길게 나누지 않았지만, 그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나 몇 가지 행동만으로 ‘쟤는 ~ 한 사람이야'라며 지레짐작해버린다.       


   

어떤 사건을 접할 때도 마찬가지다. 쟁점이 되는 특정 사건에 대해 사실 여부를 따져보거나 곰곰이 생각해보려는 수고는 전혀 하지 않은 채, 그저 권위 있는 누군가의 말이나 여론에 휩쓸려 이리저리 판관의 잣대를 들이민다.            



예술 작품도 그렇다. 한 작품을 10분 이상 관찰하지 않는다. 대충 한 번 쭉 훑고, "에이, 이게 무슨 예술이야. 이건 나도 하겠다."라며 무시하고 가버린다. 어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1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런 시간과 노력조차 아까울 정도로 별로인 작품도 있다. 작품을 대단한 것으로 신성시하며 감상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소한 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충분히 감상하고 난 뒤에 이야기하는 것이 기본자세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속단하는 것은 쉽다. 그리고 편하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 어떤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는 일,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하는 일, 사실 귀찮다. 일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우리가 왜 그런 노력과 시간을 쏟아 관심 어린 시선을 줘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속단'은 무책임한 행동이자 대상에 대해 폭력이 될 수 있다. 바바라 크루거의 말처럼 우리 마음대로 상대를 대상화하는 행위는 폭력이다. 시선조차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말 하나, 행동 하나를 하기 전에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쉽게 판단하지 않는 것은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난도질할 수 있으니 말이다.  




Barbara Kruger, Untitled (Your gaze hits the side of my face), 1981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나 자신에게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다. 결국 자기반성이다.

이러한 생각이 든 이유는 척 클로스(Chuck Close)의 작품 때문이었다. 많은 책에서 그를 미국을 대표하는 '하이퍼 리얼리즘' 또는 ‘포토 리얼리즘’ 작가로 소개한다. 그러면서 그의 초상화를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초상화가 왜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시도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설명 없이 예찬만을 늘어놓은 책 구석에는 그의 작품이 조그맣게 들어가 있었다. 그것을 보며 ‘사진이랑 똑같이 그린 그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었다.



사진과 똑같이 그린다는 행위, 즉 베껴 그리는 것은 대상에 대해 고민이나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따라만 그리는, 심지어 작가로서 무책임하게까지 보이는 행동이라고 치부했다. 그렇게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의 작품에 대해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작은 삽화 하나만 보고 속단하고 넘겨버렸다. 그러고는 하이퍼 리얼리즘 작품은 별로라며 떠들고 다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그때의 속단과 오만이 부끄럽다. ‘사진과 똑같이 그린다’라는 행위 자체가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평범한 포즈의 얼굴을 근접 촬영해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린다. 그 얼굴은 전혀 꾸며지지 않은 채, 민망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마치 경찰이 범죄자의 얼굴을 인식하기 위해서 찍은 머그샷(mug shot)과 같다. 아래의 그림처럼, 얼굴에 있는 주름부터 늘어진 땀구멍까지 모두 그려 넣는다. 이렇게 그는 아름답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얼굴 사진을 똑같이 확대해 거대한 캔버스에 옮겼다.    



(왼)Richard, 1969, acrylic on gessoed canvas, 108 x 84 in    (오)Keith, 1970, 108.25 x 84 in




Big Self-Portrait, 1967–1968, acrylic on gessoed canvas, 107.5 x 83.5 in.



극사실적으로 표현된 거대한 얼굴은 압도적이다.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피부는 뽀샤시하게, 턱은 날렵하게 보정된 피사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진다. 만약 이렇게 사진이 나왔다면 당장 삭제 감이고, 이렇게 초상화를 그렸다면 돈을 물어주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고화질보다는 저화질의 셀카 카메라를 선호하는 우리에겐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초상화를 그려왔다. 그들과 그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들은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렸다면, 척 클로스는 ‘대상’이 아닌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점이 다르다.



사실 초상화는 작가의 시선에 의해 대상이 해석되어 그려진 그림이다. 동시에 거기에는 주문자의 요청이 들어간다. 초상화는 주문자가 원하는 그의 이미지에 맞춰 좀 더 멋지고 아름답게 꾸며진다. 결국 작가는 눈 앞에 서있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사실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재창조된 대상을 캔버스 위에 그려 넣는다. 초상화는 그 대상이 아닌 '대상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파악하고 해석한 대상을 좀 더 잘 표현기 위해 고민한다. 그는 캔버스라는 2차원의 한정된 공간에 대상의 이미지를 온전히 담아내야 한다. 오직 이미지, 시각적 요소만을 이용해 대상의 '느낌'과 함께 '영혼'까지도 구현해내야 한다. 훌륭한 초상화는 대상의 숨결부터 정신까지 나타낸다고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그림 속에 여러 가지 요소를 사용한다. 한스 홀바인의 <헨리8세>나 <대사들>에서 볼 수 있듯이, 주인공의 신분과 지위 또는 부를 나타낼 수 있는 옷과 장신구, 그 외 상징적인 물건들을 함께 그려 넣는다. 또한 눈빛과 표정 그리고 자세를 통해 인물의 심리와 성격을 나타낸다. 이렇듯 초상화는 대상에서 풍기는 분위기까지 담아내기에, 작가가 대상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 눈빛이 느껴지곤 한다.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를 보면, 공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애정 어린 눈길이 보인다.



Hans Holbein,  (왼) <Portrait of Henry VIII>, 1537 - 1547         (오)<The Ambassadors>,1533       Mar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Portrait of the Margarita



이러한 초상화의 대상은 작가 자신이 되기도 한다.

렘브란트의 자상화 연작은 그의 심리며 그의 영혼까지 잘 드러낸 걸로 유명하다. 명암대비를 통해 부드럽고 유려하게 묘사된 인물은 심리적으로 강하게 파악된다. 반 고흐 역시, 여러 개의 자상화를 남겼는데, 그는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색채와 회오리 치는 짧은 붓터치로 표현했다.



   (왼) 렘브란트, <Self-Portrait>_1659                         (오) 빈센트 반 고흐_<Self-Portrait>_1889         




이와 같이, 화가의 머릿속에서 해석되고 재가공된 '대상의 이미지'는 붓끝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초상화를 보며, 척 클로스는 '작가의 눈'이 대상을 왜곡시킨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사진기의 눈'은 훨씬 더 솔직하고 정확하다고 여겼다. '사진기의 눈'은 대상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렇기에 그는 '대상'이 아닌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사실 사진에서도 그 사진을 찍은 작가의 시선이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사진작가에 의해 이미지가 가공될 수 있다. 어떻게 프레임을 잡고, 어떤 각도에서 찍으냐에 따라 대상의 느낌과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물론 같은 인물이더라도 어떤 배경에서 어떤 표정과 포즈, 그리고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에 따라서도 다르다. 거기에다가 사진의 색감에 따라서도 분위기와 이미지는 만들어진다. 카메라에 어떤 필터를 적용하는 가에 따라 발랄하고 활기찬 느낌이 들 수도, 우아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는 누구보다도 인스타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잘 알 것이다.



© 태연 인스타그램



사진으로도 이러한 시선을 없애버리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바로 여권 사진처럼 얼굴만 찍은 사진이다. 좀 더 강력한 인상을 주기 위해 꾸미거나 부풀리지 않은, 그야말로 중립적인 사진. 그래서 그는 머그샷(mug shot)과 같은 얼굴만이 정직하게 나온 흑백사진을 찍어서 그렸다.





  정직하게, 두 발을 땅에 딛고, 펑! 찍는 교도소 사진처럼 말입니다. 경찰이 원하는 정보가 본질적으로 내가 원하는 정보예요. 즉, 있는 그대로의 정보.

- 척 클로스와 앤드류 주커만 인터뷰 내용 中




그 전까지의 작가들은 대상을 자신이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대상을  충분히 표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척 클로스는 겸손했다.  그는 사진기라는 매개를 통해 '대상'과 거리를 둔다. 대상에 대해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즉, '대상에 대해 해석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해석하지 않는 것'과 '해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후자가 훨씬 적극성을 나타낸다. 해석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무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자신이 대상을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그만둔 것이다. 성철 스님의 말처럼 그는 산은 산으로 보고, 물은 물로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기는 모기이지, 우리 기준으로 해충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월권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지만 대상을 해석하기를 그만뒀지만, 그는 작가이기에 어떻게 해서든 해석되지 않은 대상을 표현하긴 해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바로 '얼굴'이다. 손도, 발도, 소지품도 아닌 얼굴을 선택했다. 그의 초상화에는 어떠한 배경도, 포즈도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얼굴만이 캔버스를 꽉 채운다.




Mark, 1978-1979                                                                     Linda, 1975-1976


Susan, 1971, acrylic on gessoed canvas, 100.5 x 90 in.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드러난다.

그 얼굴은 마치 삶의 로드맵과 같다. 평생 웃으며 살았던 사람은 입가에 부드러운 주름이 얼굴이 남아있고, 화를 내고 찌푸린 사람은 미간에 굵은 주름이 남아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모두가 있는 경우도 있다. 평소에 음식을 어느 쪽으로 많이 씹었는지도 턱근육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얼굴에는 상처며, 주름 하나에도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굴에 희로애락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희로애락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하기를 원치 않았다. 단지 그 정보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는 울거나 웃지 않는다. 더하지 않음으로써 한 사람이 겪은 모든 범위의 경험을 한 작품에 담아낸다. 표정도, 배경을 포함한 모든 것을, 얼굴 외에 부차적인 것은 모두 없애버렸다.



또한 그는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마지막 작업까지도, 그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려고 한다. 사진을 작은 그리그로 쪼개 한 조각씩 캔버스로 옮겨놓는다. 전체를 보며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옮기는 것은 마크의 얼굴이 아닌 마크의 얼굴인지도 알 수 없는 조각 하나를 옮기는 것이다. 그것은 마크라는 삶의 조각 하나일 것이다.




척 클로스의  작업 과정, ©1998 Chuck Close
Big Self-Portrait, 1967-68.Acrylic on canvas.  273 x 212 cm. ©1998 Chuck Close



척 클로스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지 마. 아는 만큼만 안다고 그래.

                                       -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中 고순이 경남에게 남기는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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