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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주 Jun 26. 2018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데미안 허스트의 <A Thousand Years(천 년)>

예술이란, 본디 은유이다.

은유란 곧 닮음이다.

예술이란 닮음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 삶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우리 삶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해 보여준다. 이러한 삶의 변주를 보며 우리는 인생에서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감동을 받기도 하고,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아름답고 좋은 감정보다는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우리를 오랫동안 붙잡듯이, 예술에서도 충격을 준 작품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데미안 허스트의 <A Thousand Years (천 년)>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작품을 보며 느낀 충격은 기괴하거나 상식을 뛰어넘는 이상함에서 오는 것과 다르다. 일명 '팩폭'을 당했을 때 느끼는 충격과 비슷하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굳게 믿어온 나의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이 대놓고 이야기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아닌 척하려 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 자신은 그 '팩폭'에 당당하게 반박할 수 없다. 이 곤혹스럽고 겸연쩍은 진실은 곧 거북함과 불편함으로 변한다.



데미안 허스트의 <천 년>이 딱 그러했다.

소름 끼치게도 <천 년>은 우리 삶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천 년>은 두 개의 유리 상자가 나란히 붙어있는 구조물이다. 이 두 유리 상자 사이에는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있어 둘은 연결된다. 그리고 그 안에는 특별한 오브제가 들어있다. 한쪽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하얀 상자가, 반대편에는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은 소의 머리가 놓여있다.      





흰 상자와 소의 머리.

황당할 정도로 이 둘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면, 이 둘 사이에 흥미로운 일이 생긴다. 시간이 지나자 새하얀 상자에서 시커먼 파리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사실 흰 상자는 구더기로 가득 차 있었다. 흰 상자 속에서 조용히 꿈틀거렸던 구더기는 파리로 변태해 반대편 유리 상자로 날아간다. 목적지는 소머리이다. 파리는 지극히 본능적으로 소머리를 갈망한다.





그러나 모든 삶이 순탄치만은 안 듯이 파리에게도 복병이 존재한다. 바로 곤충 퇴치기이다. 잔인하게도 소머리 위로 차가운 빛을 내는 곤충 퇴치기가 매달려있다. 파리가 소머리 위로 내려가 앉으려는 순간 빠지직거리며 타 죽는다. 친구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리들은 계속 이어서 소머리로 날아온다.



어떤 파리들은 타 죽고, 어떤 파리들은 살아남아 유리 상자 안을 맴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머리는 썩어가고, 바닥에는 파리 사체가 시커멓게 쌓여간다.

그리고 쌓여가는 시체만큼이나 살아남은 파리들도 투명한 유리상자를 까맣게 뒤덮는다.

    


데미안 허스트,  A Thousand Years(천 년), 1990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엉킨 채, 유리 상자 안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는 반복된다.

 

태어나고, 욕망하고, 죽는다. 


마치 우리들의 삶처럼 말이다.      



이렇게 <천 년>은 우리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안정된 기하학 구조의 유리 상자, 그리고 그 안에 유기물의 지저분한 삶과 죽음. 이러한 대조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이 유리 상자는 "우리(관람객)"와 "작품"을 분리해준다. 유리 상자로 인해 작품이 머물고 있는 자리는 우리가 서 있는 공간과 따로 떨어져 나와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는 유리 상자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차분히 관조할 수 있다. 분리라는 것은 참 중요하다. 그 속에 있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 상자가 없었다면 악취에 코가 마비되고, 파리를 쫓아내느라 정신없어 아무 생각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는 죽어가는 사체 위에 파리가 꼬여있는 모습을 보고도 그저 찡그린 채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는 삶도 마찬가지다. 국자는 국 맛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삶"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삶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한 발자국 떨어져 나와야 한다. 밖으로 나와 떨어져야 선명하게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밖에 서서 파리의 삶을, 곧 우리의 삶을 볼 수 있었다.



생의 욕구
그리고
생과 사



인류가 등장한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삶이 존재했다. 지금도 75억 명이라는 전 세계의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바로 "생과 사"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역사는 생의 욕구로 추동된 생과 사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살게끔 만드는 "생의 욕구"가 때로는 오히려 우리를 죽게 만든다.

구더기는 파리가 되고, 본능적으로 소머리를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그 소머리 때문에, 그 욕망 때문에 타 죽는다. 아무리 소머리 주위에 타 죽은 파리 시체가 널려있어도, 끊임없이 파리들은 소머리로 날아든다. 그리고 또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과로사하는 우리처럼 말이다.



만약 머리 옆에 안전하게 먹을 수 있지만 머리보다는 맛없는 먹이가 있었다면, 파리들은 소머리 대신 그것을 선택했을까?



아니다. 그래도 머리를 향해 돌진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생의 욕구"에 플러스알파를 더 갖고 있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이다. 이 욕망 덕분에 인류는 뛰어난 문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잘"이라는 것이 독이 되어 우리의 삶을 갉아먹기도 한다.



그 욕망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때, 균형은 깨지고 우리의 삶은 망가진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행동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반복한다. 지난번에 과식하다 체해 무진장 고생했으면서도, 배가 터질 것 같지만 손에 들고 있는 치킨을 쉬이 내려놓지 못한다.  술로 인해 간이 망가졌지만, 손에는 여전히 술잔이 들려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또 욕망한다. 그것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욕망은 삶 그 자체이다. 살아 있기에 욕망하는 것이다. 욕망하는 게 곧 삶이고 욕망이 끝나는 것은 곧 죽음이다.



우리를 숨 쉬고 살아있게 하는 그 욕망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는 우리 삶의 가장 큰 과제가 아닐까 싶다. 



<For the Love of God(신의 사랑을 위하여)>와 데미안 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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