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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닐슨 Feb 26. 2024

불가능한 공존

난데없이 모기 한 마리가 날짜를 모르는 것인지 잠이 살포시 들려는 순간 애앵하며 오른쪽 귀를 스쳤다. 모기는 아직도 주둥이를 박아 넣을 곳을 찾으려고 열심히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그것이 이놈의 습성이니 어쩔 수 없다. 피를 빠는 모기는 모두 암놈이니 이년이라고 해야겠지만, 년보다는 순화된 표현인 놈이라고 부르는 편이 잠을 설친 나의 정신건강과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심성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다.


이놈은 낮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잠이 들려고 하면 힘찬 날갯짓을 하며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이놈이 나를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인체에 해롭지 않다고 적혀있는 뿌리는 모기약과 대낮보다 환한 조명, 그리고 두 개의 손바닥으로 무장을 한 상태다. 이미 잠이 달아난 나의 두 눈은 왼쪽 천장 구석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다음 구석을 훑는다. 방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아래를 향해 천천히 내려오다가 멈칫. 다시 반대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며 공간을 샅샅이 훑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저었다가 다시 천천히 왼쪽으로 젓는다. 그다음엔 눈동자만 오른쪽으로 돌려본다. 귀를 쫑긋 세우고 날카로운 고주파 음을 찾는다. 내 눈은 매의 눈동자보다 밝고 올빼미의 그것보다 커지며 내 양쪽 귀는 늑대 머리에 달려있는 그것보다 더 예민해진다. 내 코에서도 박쥐처럼 초음파가 쏟아져 나오는지도 모른다. 식은땀인지 모를 한줄기의 서늘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그 순간 털이 수북한 내 다리를 스치듯 날아오르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놓치지 않고 허공의 한 점에 초점을 맞추며 놈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한껏 겁을 먹은 그놈은 온 힘을 다하며 재빠르게 천정을 향해 날갯짓을 해보지만, 놈은 나의 레이더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다! 내 손바닥은 그놈의 날갯짓보다 빠르다. 


짜악!


단 한 발의 화살로 적장을 쓰러트린 병졸의 기분일까.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은 나에게 미소를 짓는다. 왼쪽 손바닥에 눌려 터져 버린 그놈의 사체는 미처 소화를 시키지 못한 나의 붉은 DNA를 한껏 뿜어낸 채로 한적한 국도 어느 곳에서 로드킬 당한 낯선 생명체처럼 짓눌려 죽었다. 화장지로 손바닥의 사체를 닦아내며 승리의 미소를 거둔다. 승리감에 취한 탓일까.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한번 달아난 잠이 쉽게 돌아올 리 없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모기의 등장에서 시작해서 한바탕 전쟁으로 끝난 그날의 생각은 ‘왜 모기와 공간을 공유할 수 없었을까?’라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모기는 모기대로, 나는 나대로 지낼 수는 없었던 걸까. 나는 왜 손바닥으로 그 모기를 처단해야만 했을까. 생각은 계속 확장되어 아파트 담벼락 아래에 있는 작은 화단에까지 미쳤다.


큰 걸음으로 대여섯 걸음 크기의 작은 화단에는 벌과 나비가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날갯짓을 하고 있고, 비가 오는 날에는 피부호흡을 하는 지렁이가 기어 나와 꿈틀거린다. 구석에서 썩어가는 나뭇잎 위에는 아주 작은 벌레들이 날거나 기어 다니고, 그 사이로 날카로운 눈을 밝히며 길고양이가 도도한 걸음을 걷는다. 잠시 후 고양이 눈을 피해 배수구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생쥐도 그곳에 함께 있다. 푸드덕 소리에 머리를 들어 위를 보면 날아가던 찌르레기가 잠시 날개를 쉬어가고 그 아래 나무덤불에는 참새와 박새들이 떼를 이루어 숨어있다. 내 침실보다도 더 작은 화단이라는 공간에 많은 생명이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왜 작은 모기와도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 못하는 걸까. 인간은 왜 자신의 공간을 찾아온 생명을 반드시 제거해야 편안함을 느끼는 걸까.


「씨스피라시(seaspiracy)」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일본의 어느 작은 어촌에서 돌고래를 연안으로 유인해 잔학하게 죽이는 장면이 있었다. 그에 대한 해설은 이러했다.


“돌고래를 먹거나 팔기 위해서 죽이는 게 아니에요.
돌고래가 많으면 인간이 잡을 수 있는 물고기가 줄어들어요.”


소름이 끼쳤다. 인간에게 돌고래는 생존을 위한 경쟁상대였다. 돌고래를 죽이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검붉은 피와 돌고래의 비명이 흩어지는 곳에 남은 건 인간의 경제 논리였다. 그곳의 인간은 핏빛 바다를 보며 황금을 떠올리고 있었다. 인간은 돌고래와 공존을 포기한 걸까. 


돌고래가 모두 사라지면 인간의 경제적 이익은 극대화 될까.

수염고래 같은 대형 고래는 바다 깊은 곳에 살다가 먹이활동을 위해 수면 가까이 올라온다. 그때 엄청난 수의 식물성 플랑크톤을 끌고 올라오는데, 이 플랑크톤이 수면가까이에서 호흡을 하며 만들어내는 산소는 아마존이 내뿜는 산소보다 30배나 더 많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마존의 산림만 보호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다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해보자. 태평양 한가운데에 플라스틱 쓰레기로 이루어진 섬이 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을지 모르겠다. 한반도 면적의 약 15배. 플라스틱만으로 이루어진 섬이 있다는 말이다. 가끔 언론에서 이 섬에 대한 뉴스를 전하며 플라스틱 사용을 줄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섬의 46퍼센트가 버려진 어망과 어구라는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는 그 쓰레기 섬의 0.03퍼센트뿐, 빨대 사용만 줄이면 플라스틱 쓰레기 섬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쪽에서는 그 어망의 폐해를 막기 위해 상업적 어업을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상업적 어업이란 오늘 먹기 위해 잡는 단 두 마리의 생선이 아니라 커다란 그물을 사용해서 크레인으로 끌어올려야 할 만큼 많은 양을 한 번에 잡아 올리는 어업을 말한다. 


상업적 어업의 대표 어종인 고등어나 참치를 잡을 때 가끔 함께 딸려 올라오는 밍크고래의 소식을 듣는다. 그 소식의 말미에는 늘 밍크고래가 제법 비싼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 그걸 ‘부수 어획’이라고 하는데, 그 때문에 많은 생명들이 함께 사라지고 있다. 바다거북, 상어 그리고 돌고래도 부수 어획의 피해를 입고 있다. 특히 바다거북은 여섯 종 중 다섯 종이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글을 써 놓고 보니 문제만 늘어놓았지 제대로 된 해결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것 같아 다른 생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진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 거나 ‘자연을 보호하자’ 같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인류를 덮친 바이러스 역시 박쥐의 공간을 인간이 침범한 때문이라고 한다. 박쥐에게 기생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숨어들었고 변이가 되었다는 게 지금까지 밝혀진 팬데믹의 이유이다. 요즘 언론에서는 그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이러스와는 공존을 하고 박쥐와는 공존을 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다른 생명들과의 공존은 왜 말하지 않는 걸까.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인간은 인간끼리의 공존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무척 우려스럽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이미 지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과연 나는 오늘 밤 모기와의 공존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놈에게 내 공간을 조금 나눠줄 수 있을까. 답 없는 생각만 가득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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