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낯간지럽지만 내게 너무 중요한 사람에 대해 써볼까 한다. 나의 현상태를 논할 때 이 사람을 빼곤 논할 수 없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한 7년 내내 남자친구가 끊긴 적이 거의 없었다. 노래하는 사람, 카누 선수, 여행 가서 만난 사람, 스토커 하던 쓰레기, 사기꾼.... 아, 군대를 기다려보기도 하고... 뭐 이런저런 사람들과 연애를 했다. 남자친구가 워낙 자주 바뀌다 보니 지난 연애가 잘 기억이 안길래, 한 번은 친구들과 나의 엑스들을 연도별로 정리를 해놨던 적도 있었다.
딱히 의도를 갖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건 아니었다. 나는혼자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 사람인지라 딱히 데이트를 즐겼다거나 한것도 아니었다. 단지 만나고 헤어지는걸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던 거 같다. 어쩌면 아빠와의 애착이 덜 형성돼서 빈 공간을 채우려고 그랬는지도.
그렇게 끊임없이 연애를 하다가 드디어 한 2년 정도 연애 공백을 갖게 되었다. 소모적인 연애가 지겨웠던 차에, 엄마가 제주도로 가면서 비로소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전국 곳곳으로 차박을 다니며 자유롭게 살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정립하던 때였다. 라이프스타일, 정치, 환경, 사회운동, 페미니즘 뭐 그런 거에 대한 나의 생각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라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바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기에 나는 많이 깊어지기도 했고, 한편으론 조금은 편협한 사람이 된 거 같다.
그러던 21년도 겨울, 간간이 찾아오던 외로움에 '튤립'이라는 데이트 어플을 시작했다. 여러 가지 가치관 질문들을 통해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꽤나 신박한 어플이었다.
그 어플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또래의 남자들 중 80%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오랜 비혼주의자였던 나는 결혼과 출산을 당연한 미래로 두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거르고 거르니 내게 남은 선택지가 참 좁았다. 운 좋게 가치관이 얼추 맞아 몇 명 만나봤는데, 내 눈에 그다지 섹시해 보이지 않아 허탕을 치기도 했다.
데이트 어플 또한 너무나 소모적인 거 같아 거의 포기하고 있던 찰나나와 가치관이 90% 이상 일치하는 섹시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이 지금의 남자친구, 김블리이다.
김블리와의 첫 만남 썰을 풀어보자면.
처음 만나기 전에 먼저 전화통화를 했더랬다. 그 당시 김블리의 관심소재였던 토픽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통화를 하고 나서 밤이 늦어 전화를 끊어야 했다. 목소리로 느끼기에 그는 신중하고 조용하고 소극적인 사람인 듯했다.
안타깝게도 이전 연애를 통해 쌓인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내가 극외향적이고 도전적인탓에 소극적인 사람과의 연애는 끝이 항상 안 좋았다. 더 이상 그런 끝이 보이는 연애를 시작하고싶지 않아서 통화를 마친 뒤 김블리에게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당시 나는 진짜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김블리는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였었다고 한다.)
그렇게 친구로서 밥 한 번 먹자고 해서 처음 만나게 된 날이 2021년 12월 19일, 크리스마스를 앞둔 추운 겨울날이었다.
천안아산역에서 처음 만났다. 코로나가 극심하던 시기였는데, 부끄러워서였는지 김블리는 차안에 있는 내내 마스크를 안 벗고 있었다. 마스크 뒤의 하얀 피부와 큰 눈만 보였다.
우린 바로 불당동 비건카페로 이동했다. 그리고 카페로 들어가는 김블리의 꽤나 거침없어 보이는 뒷모습을 보고, 그때 '아 이 사람은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소극적인 사람은 아닐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카페에앉아 마스크를 벗는데 너무너무 귀여웠다. 웃는 게 정말 예뻤고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 카페에서 나는 뿅 사랑에 빠졌고, 크리스마스에 김블리가 살고 있는 순천으로 가서 우리 사이를 연인으로 정리했다.
이전까지 가치관이 서로 잘 맞는 게 이렇게까지 좋은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거 같다. 나의 구린 사상을 마음껏 토해내기도 하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구구절절 해도 전혀 거리낌이 없어서, 같이 있으면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생각과 말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올바름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다. 비슷한 정도의 결핍, 서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패턴, 대체로 일치하는 지향하는 방향 등등...
부모님께 처음 소개를 시켜준 남자친구이고, 또 결혼이라는 게 나의 일로 와닿게 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상상하는 모든 미래에 최대한 같이 있을 수 있길. 내가 그 모든 순간에준비가 된 사람이길 바라고 바라고 있다.
처음 만난 2년간은 김블리 덕분인지 악몽도 꾸지 않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행복했다. 요즘엔 개인적인 일로 다운돼있긴 하지만 대체로 안정적으로 행복하다.
어쩌면 내가 여러 사람들을 거치며 '내가 가진 사랑의 모양'을 알게되었기에, 나의 사랑과 꼭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아닐까.ㅎ (땡스투 엑스들)
김블리의 조용한 첫인상과 다른 의외성이 하나 있는데, 그는 드립과 밈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매번 내게 유행하는 밈을 보여주고, 이상한 춤도 추고, 틈만나면 어딘가에 숨어있다.
한 번은 내가 "개그나 농담 없이 1년을 살면 10억을 준데. 할 수 있어?" 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한 3초쯤 고민하더니 단호히 "안 해"라고 할 정도로 김블리에게 '웃음'은 최상위 가치 중에 하나이다. 장난과 드립이 끊임없는 사람인데도, 낯을 조금 가려서 내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김블리가 이렇게 웃긴 사람인 줄 모르고 있는 것도 너무 웃기다. 최근에 내 막냇동생과 몇 번 만나더니, 동생 앞에선 조금씩 입이 풀리는 거 같기도...
가끔 김블리의 진실한 생각에 인사이트를 받곤 한다. 어떤 개념이던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본인의 방식으로 생각 한 뒤 행동하는데, 그 모습에 거짓이 없다는 게 느껴져놀라울 때가 있다. 나는 가끔 생각의 모순에 잠기곤 하기에김블리의 이런 점을 꼭 배우고 싶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수만 가지인 열정맨이다. 대학원, 이민, 이직 등등 많은 선택지를 갖고 살고 있다. 그래서 가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김블리에게 희생을 바라는 걸까' 생각하곤 하지만, 그런 경우에 보통 고맙게도 김블리는 딱히 깊이 생각하진 않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그런 상태이다. 미리 걱정하고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걸 상기시켜준달까.
또 서로의 영역을 적절히 구분해하며 연애하고 있어서, 내가불필요한 책임감 같은 걸 갖지 않을수 있다. 걱정인형인 내겐 참 고마운 파트너이다.
김블리는 언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너의 시간을 내가 다 가질 순 없어.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나는 너에게 좋은 선택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 그리고 정말로 내게 항상 좋은 선택지가 되어준다. 나와 같이 방방곡곡 어디든 같이 가준다. 올해는 제주도 자전거 종주, 두 번의 페스티벌(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DMZ 피스트레인), 한 번의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하나 둘 공동의 추억들이 쌓이면서 점점 서로에게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올해도 정말 재밌게 놀아보자!
우린 아직까진 롱디이다. 둘이서 천안~순천을 오가는 KTX에 700만 원 정도 쓴 거 같다. 이런 물리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때보다 같이 있을 때 더 마음이 편해서 2년 반의 롱디가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래도 이제 슬슬 KTX가 지긋지긋해지던 찰나... 다행히 김블리가 서울로 부서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반기부터는 같이 살수있기를 기대하고있다.
그렇다. 서른이 된 나는 연애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있다. 재밌는거만 골라하던 연애와 달리 이제 이런저런 현실적인것들을 같이 논하며 삶의 방식을 맞춰가야 한다. 많이 준비해도 문제는 터지기 마련일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야할 길에는 정말 다양한 갈등과 시련이 우리 앞에 있겠지.조금은 겁도 나지만 아주 가치 있어 보인다. 대화하고 배려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