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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랑 Apr 03. 2024

6. 오랜 나의 가족

서른 프로젝트






서른 프로젝트, 서른을 맞아 지금의 나를 기록하










6. 가족





오늘은 가족을 생각해 보자.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느냐'는 설문조사를 여러 나라에서 시행한 결과를 본적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 사람들이 가족을 가장 높게 꼽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이 가장 중요했다.)

설문 결과를 보고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떠올렸을 때 나는 오직 나만의 발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족가장 중요한 문화는 어떤 기분일지, 일을 하고, 성취하려 애쓰고, 갈등하는 나의 이 삶의 목적이 가정의 행복인 삶은 어떨지 궁금했다.





서른이 되어버린 지금, 한 해 한 해 가족의 중요성 점점 커지고 있는 걸 느끼곤 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가는 한 마리의 포유류로서 안정적인 나만의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나서일까. (작년쯤부터 길거리에서 아기를 보면 가슴이 찡 해오곤 한다. 애 낳을때가 된걸까.)

아니면 살다 보니 나를 지지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나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지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인간이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내게 가족이란 의미가 조금씩 커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나는 세 자매 중 첫째이다. 엄마는 제주도에, 아빠는 상주에, 동생들은 각각 서울과 부산에, 그리고 나는 천안에 살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들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이건 어쩌면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우리 가족의 성향이 묻어있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한다.













첫 번째로 내게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하나인 엄마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고집 세고 솔직한 엄마를 많이 닮았다. 엄마는 내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다.


어디서 본 글인지, 그냥 끄적여 놓은 건지 모르겠는데 내 메모장엔 이런 글이 있다.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엄마를 가진다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너무나 많이 공감한다.

길을 걷다가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면 나는 엄마가 매일 구워주던 부드럽고 따듯했던 식빵이 떠오른다. 어릴 적 항상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를 외쳤고, 엄마가 우릴 위해 만들어 놓은 그날의 간식을 먹었다. 엄마가 잠들었을 때에도 우리가 "엄마!" 하면 언제나 바로 눈을 뜨며 대답해줬기 때문에, 엄마가 잠귀가 정말 많이 어둡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땐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순간들이지만, 이제 그때를 떠올리면 이 세상 어떤 사람이 나를 그만큼이나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어릴 적 우리 엄마는 경제적인 문제로 아주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엄마는 조울증과 우울증을 앓았던 거 같다. 그런 엄마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빨리 철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엄마와 나는 서로의 힘든 점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친한 친구가 됐다.

내가 고등학생 때쯤, 엄마는 법륜스님의 정토회를 통해 불교 공부를 시작하며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잘은 모르지만 마음공부라는 그것을 통해 엄마는 자격지심, 미움, 불안 같은 내면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우리 엄마와의 재밌는 에피소드 몇 개만 좀 적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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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년 전쯤, 내가 진지하게 미국 유학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때였다. 엄마에게 너무 비싼 유학비용과 기회비용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회사 관두고 빚까지 내면서 힘들게 유학을 다녀왔는데, 취업도 안되고 아무것도 못 이룬 상태로 엄마 옆에서 붙어서 평생 살면 어떻게 하지?"

"이야, 그거 얼마나 재밌겠니. 네가 미국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재밌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겠어. 그 기억만으로도 너 인생은 충분히 흥미로워질걸?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이 말을 들은 순간 내가 걱정하고 있던 것들이 하찮아 보이면서 마음이 놓였다. 참 감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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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엄마와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갑질'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는 권력을 함부로 주는 것이 문제라고 하며 "내가 취할 있는 반대급부가 있으니 권력을 준 것이지, 권력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누군가에게 존경을 줄지언정 권력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엄마는 내가 삶을 잘 살아갈 수 있게 아직도 많은 서포트를 해주고 있다. 내가 가족들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 나와 가족을 분리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각자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나만 신경 쓰면 된다는 생각을 열심히 심어주었다.

어떤 두려움이 몰려와도 엄마와 얘기하고 나면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돼버리곤 한다. 나도 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 평생 엄마가 되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ㅎ










두 번째로 나는 두 명의 동생있다.

동생들은 부모님께 받은 최고의 선물들이다. 형제가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같은 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성향, 비슷한 도덕성,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대화가 잘 통한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얘네는 커서 뭐가 될라나, 싶었다. 고작 몇 살 차이라고 동생들이 그렇게 철이 없어 보였는데 최근엔 다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동료가 되었다.







세 살 터울인 둘째는 내게 이란성쌍둥이 같은 존재이다.



둘째는 나와 한 배에서 나온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다. 수학을 좋아하는 나와 다르게 동생은 문학에 소질이 있고, 얼굴이 동그란 나와 다르게 동생은 길쭉하다. 무딘 나와 다르게 동생은 섬세하다.



우린 참 많이 싸웠다. 하루 종일 최소 20번씩은 싸우며 자랐다. 기골이 장대한 내 동생은 3살 때부터 6살이었던 나와 키가 같았고, 초등학생 때 이미 170을 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싸운 이유는 덩치가 산만한 동생이 작은 나를 깔보며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오래도록 생각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MBTi가 성행하고 나서야 동생과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걸 알았다.

나는 ENFP, 동생은 ESTJ.

알고보니 우린 생각하는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싸운 이유를, 그렇게 오래 싸우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인이 되어서는 피차 치열하게 사회화되기도 했고 일 년에 두세 번밖에 못 보니 애틋한 사랑만 남아 보이지만, 일주일 이상 같이 있으면 한 번쯤은 싸울게 분명하다... 맞지?




돌이켜보면 어릴적 둘째는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 그땐 그냥 동생이 졸리거나 기분이 안 좋나 보다, 하고 가볍게 생각하곤 했다. 예민한 기질이었던 동생을 이해하기엔 나는 너무나 무딘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참 뒤 이런저런 다름을 이해하고 난 뒤, 어쩌면 내가 조금 덜 무딘 사람이었다면 동생을 더 편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

그때 어떻게 했든 간에 지금은 각자 갖고 태어난 대로 잘 살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셋째는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심지어 나는 막내가 처음 우리 집에 온 2001년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가끔 동생이 아니라 내가 키운 같다는 착각이 들곤 해서 괜히 더 잔소리를 하게 된다. 요즘엔 동생을 위해 그래선 안돼, 동생은 한 명의 인격체야...라고 나자신을 교정시키곤 한다.



아주 갓난 아기 때부터 셋째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색이 뚜렷한 셋째를 단순히 '귀여운 막내'로만 본건 아닐까 싶다. 셋째가 성인이 된 뒤어 말하길,우리끼리만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며 셋째를 끼워주지 않았었나보다. 언제나 많은 관심과 사랑만 받고 자란 줄 알았는데 그 안에 외로움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린 각자 제멋대로 잘 자라서 자기 맘대로 잘 살고 있지만 말이다.




셋째는 공연에 미친 자이다. 공연 기획을 하며 매일 공연을 보면서도 연차를 쓰고 공연을 보러 간다. 내게도 언젠간 그렇게 미친 듯이 빠져있던 게 있었겠지만, 이 친구처럼 이렇게 업으로 삼으며 빠져있는 삶을 살아볼수나 있을까 싶다.

셋째는 요즘 성장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듯하다. 그 시간들을 지나며 어떤 가치를 선택하며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올 것이 왔다. 아빠.

내게 아빠는 애증의 존재이다. 아빠는 나의 모든 트라우마와 삶을 괴롭히는 것의 중심에 있는 동시에 내게 가장 가슴 아픈 존재이다.



 

아빠는 언제나 경험과 행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어릴 적 많은 경험을 하고 넓은 세상을 보는 것에 모든 자원을 쏟아부었다. 아빠는 평생 남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우린 때가 되면 아빠를 따라 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했다. 또 아빠는 잘 내색하지 않지만 가족들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여기까지.




아빠에 대해 더 자세히 쓰고 싶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

내 마음속에 정리가 안된 이야기를 섣불리 글로 써서 내 속에 박제하고 싶지 않다.

아직 내 안의 어둠을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머리로는 아빠를 이해하고 감사하고 사랑하지만, 가슴으론 아직 미운 맘이 크다.

서른이 됐으니 아빠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적기인 거 같다는 생각도 한다. 조만간 아빠와 나의 맘을 다 터놓고 얘기할 수 있길, 그 순간만큼은 아빠가 내 진심을 알아주길....





다음 생엔 아빠가 꼭 내 아들로 태어나길 바란다. 난 정말 아빠를 잘 키울 거다. 누구보다 가장 많이 사랑해 줄 거고,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아빠의 타고난 리더십과 현명함을 이용하여 세상에 도움 되는 사람으로 성장시킬 거다. 나는 꼭 그럴 거다.










끝.







* 참조

(기사) 삶의 의미 어디서 찾냐 묻자… 한국인만 이걸 1위로 꼽았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future/10203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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