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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랑 May 01. 2020

5. 나의 할머니

할머니와 죽지 않을 병


그녀는 한 달 만에 전형적인 노인이 되었다. 


이제 모든 것에 무기력한 채 아이가 되어버린 그녀에게선 더 이상 이전의 ‘나의 할머니’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개그우먼 김신영이 할머니 성대모사를 봤다. “죽어야지…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사시면서 몸에 좋은 건 꼬박꼬박 챙겨 드신다는 본인의 할머니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지금의 우리 할머니처럼…


나는 다도를 좋아한다. 다도란 차를 마시는 예법으로 차를 마시는 일련의 과정을 차례차례 습관처럼 행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에 집중하여 차를 우리다 보면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 모든 생각이 지워지고 다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언제 어디서든 다도를 할 때만큼은 나의 모든 생각을 비우고 오롯이 나 자신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다도의 의미이다. 


나에게 그녀는 다도 같은 존재였다. 내게 깊은 고민이 있거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땐 언제나 버스를 4번이나 갈아타며 혼자 시골로 가고 했다. 그녀는 나의 엄마가 태어났던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반가움을 표현하되 절대 그것을 넘치게 표현하지 않았고, 배려 또한 본인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되 못해준 것에 아쉬움을 갖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밭일을 하고, 산책을 하고, 마루에 앉아서 이런저런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받아주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의 그 깊은 고민들이 작고 하찮게 느껴지다가 결국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곤 했다.

모든 자극에 반응하며 살아오던 지친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 


세 달 전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리게 된 후, 나는 ‘나의 할머니’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크게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적다 보면 할머니가 한순간 변해버린 원인을 찾아 다시 할머니를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려운 수학 문제일수록 풀이를 예쁘게 적어야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알고 보니 내가 느낀 할머니에 대한 상실감은 그녀가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청년일 거라 생각한 내 탓이었다. 


누군가를 잃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헤어짐은 너무나 힘들다. 하지만 회자정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이는 만남과 헤어짐의 횟수는 같다는 말이다. 이를 연역적으로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까지 만남만을 겪어 왔으니 지금부터 나의 앞날엔 만남보다 헤어짐의 횟수가 더 많다는 뜻일 것이다. 헤어짐에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어떤 만남과 헤어짐에도 의연한 사람으로, 이렇게 조금씩 무뎌질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난 아직 KBS를 틀어놓은 사랑방 텔레비전 앞에서, 얕은 요를 깔고 할머니와 마주 보고 누워있던 그 순간들이 자꾸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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