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것은 비단 악뿐이 아니다.
1. 영화의 타이틀은 다음과 같이 떠오른다.
evil / exist / does / not
작은 산골마을에서 어린 딸과 함께 살고 있는 타쿠미. 마을은 물론 산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잘 알기에 주민들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심부름센터로 일하는 그에게 어느 날 글램핑장을 만들겠다는 도쿄의 사람들이 찾아오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2. 제일 먼저 느끼는 감정은 이 일반적이지 않고 기묘한 샷들의 의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익숙한 영상 문법으로 진행되지 않는 점, 심지어 배경음악은 쭈욱 깔리다가 툭 끊기기도 한다. 이러한 지점들 때문에 초반부는 상당히 기괴한 인상으로 인물들과 이들이 사는 마을을 바라보게 된다.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지점은 이 마을에 글램핑장을 만들려고 하는 회사의 사람들이 개최하는 설명회 장면에서부터다. 익숙한 이야기가 나오고, 갈등이 등장하며, 대화가 오가면서 다시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집중하게 된다.
3.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가 주인공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는 전혀 설명을 하지 않는 데에 비해, 글램핑장을 만들기 위해 도쿄에서 찾아온 연예기획사 직원들의 경우는 '대사'를 통해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양보호사였던 마유즈미가 갑자기 연예기획사에서 일하게 된 계기라던지, 이 바닥에서 17년이나 일을 했지만 헛헛함과 외로움을 느끼는 타카하시의 감정들은 심지어 공감까지 가게 만들고 그들을 친근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4. 행방 불명된 하나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후반부를 맞이하며 이 모든 이해가 되지 않는 시선, 편집, 스토리텔링 방식이 모두 인간의 이치를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영화의 주요 갈등인 자연과 개발하려는 인간 사이에서 영화는 자연의 시점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도 자연에 가까운 인물들인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인간이 생각하는 인과율에 벗어나 있고,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인과를 찾고, 의미를 찾기에 자연은 압도적인 공포로 다가온다. DNA에 새겨진 원초적인 공포이기도 하고. 자연의 섭리 안에서는 선과 악은 없다. 아예 판단 주체나 기준도 없다. 그저 작용한다.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듯이. 인간 기준에서는 공포스럽고 냉혹하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자연은 어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사슴의 눈망울처럼 그저 '순수'일 뿐이다.
5. 끝에서부터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하는 영화였다. 장면을 곱씹으며 이 영화의 핵심이 무엇일까, 내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고, 생명에게는 생과 사의 구분만이 존재한다. 자연이 운행하는 그 본질을 응시하게 하면서 지금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더덕더덕 붙여놓고 사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것들이 나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비단 악뿐이 아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매달려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