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내가 그 여인을 살렸을지도 몰라.
핸드백보다 큰 에코백을 늘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있다. 보부상처럼 잡다한 물건을 몽땅 넣기 편해서다. 가벼운 책 한 권, 노트와 펜 그리고 선크림과 빨간약이라고 불리는 소독약을 챙긴다.
나는 소독약을 무척 좋아한다. 아주 어릴 적에 읽은 책이라서 제목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어떤 소설의 한 대목이 강렬하게 머리에 남게 된 후로 소독약을 좋아하게 됐다.
그 소설의 제목이 뭔지 누가 좀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적어보자면,
의사인 아들이 어느 날 왕진을 나선다. 도착한 집에서 환자의 생명을 살리지만 그만 의사는 실수로 손에 상처가 나고 만다. 환자는 감염병을 앓고 있었고 의사는 당황했지만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여지없이 의사는 감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죽고 만다. 아버지는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의 꺼져가는 생명을 지켜보며 절규한다.
"그래 그 집에는 그 흔한 옥도정기조차 없었냔 말이다! 단 한 방울의 옥도정기만 있었더라면..."
그 장면을 읽고 무척 마음이 아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젊고 똑똑한 의사가 소독약 한 방울이 없어 죽다니, 나는 왕진가방에 왜 옥도정기 하나 없었나를 아쉬워했고 환자 가정엔 흔한 옥도정기가 없었나를 아버지와 비슷한 마음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내가 중고등학생쯤 됐을 무렵부터 약국에서 요오드 소독약을 사서 늘 책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 당시 700원쯤이라 가격이 저렴해서 서랍에 두어 개, 가방에 한 개 정도가 있었다. 이 습관은 매우 오래되어 지금까지도 늘 소독약을 가지도 다닌다.
그래서 결국은 어쩌면, 내가 그 여인을 살렸을지도 모르는 날이 왔다.
내가 사는 지역에 온천수로 유명한 목욕탕에 종종 가곤 한다. 아이와 둘이 가방을 챙기면 한 보따리가 된다.
샴푸, 트리트먼트, 피부 보습제, 발 전용 타월, 몸 전용 타월, 간식, 음료수 등등을 챙긴다. 한바탕 가져간 것을 활용해 목욕을 하고 나오는데 탈의실이 웅성웅성했다.
어느 여인 하나가 바닥에 앉아 발을 감싸 쥐고 있고 사람들이 몰려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다 출입문 스테인리스 부분에 발가락이 찢어졌다는 것이다. 피가 제법 많이 나서 수건으로 둘둘 말아 지혈 중이었다.
목욕탕은 매우 청결했지만 문틀까지 닦지는 않으니까 늘 습한 상태였겠지. 나는 혹시 녹농균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여인은 어느 정도 지혈이 되자 병원에 간다며 옷을 입기 시작했고 직원이 밖에 나가 마데**연고를 사다 줬다. 살짝 망설이던 나는 가방에서 빨간약을 꺼내 다가갔다.
"소독 먼저 확실히 하면 좋을 거 같은데 쓰시겠어요?"
"아. 네."
2센티는 찢어져 보이는 상처가 개방되어 있었고 수건을 깔고 그 위로 빨간약 한통을 거의 절반가까이 부어줬다. 아주 축축하게 부어준 뒤에 깨끗한 양말을 신으라고 하고 가까운 외과나 정형외과라도 가보시라고 권했다. 여인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목욕탕을 나선다.
"엄마, 목욕탕까지 빨간약을 가져왔었어?"
아이가 새삼 나의 빨간약 사랑에 놀랐나 보다.
"음. 엄마가 어쩜 저 여자를 살렸을 수도 있어. 나 오늘 칭찬받아야 해"
딱 한 방울의 소용. 때론 희박하게나마 인생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친절. 붉고 선명한 그것이 필요한 요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