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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모어책방 Dec 22. 2021

영국에서도 사람.

영국에서 대학 졸업장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글을 쓰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보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평소 일할 때 쓰는 글들 때문인지, 학부 때부터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소신 때문인지. 관련 레퍼런스들을 찾아보고 수치를 비교해봐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어차피 주관적인 글쓰기일 뿐인데. 늘 쓸데없이 까탈스럽다.


그러다 일하기가 싫어 짧게 써야지 하고 랩탑 앞에 앉는다. 스포티파이의 즐겨듣는 노래들에 적당한 피로감, 좋아.


사실 올해 이직을 하려 했다. 너무 바빠서 사실 어디 인터뷰를 보는 것도 힘든 한 해 그리고 반을 보내고 나서, 턱 밑까지 숨이 차오르자 그냥 생각없이 달려야겠다 생각했다. 리크루터들의 이메일들은 대부분 무시하는데, 그 중 오랫동안 연락하던 리쿠르터들이 있어 이야기 했더니 몇 회사의 포지션들을 보내서 그 중 괜찮은 곳들 몇 군데랑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적당히 인상된 연봉의 포지션으로 결정 (사실 적당히라 말하기에는 인상폭이 꽤 컸다).


지금 회사랑 승진과 연봉 인상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오래됐다. 어느덧 팀에서도 경력이 많이 쌓였고, 내가 직접 리드하는 큰 클라이언트들도 있고. 여러 재미있는 R&D 결과물과 동료들의 인정, 매년 리뷰 때마다 '너 같은 사람을 또 뽑고 싶어' '넌 정말 잘했어' 등의 뼈 없는 영국식(?) 칭찬들을 듣고 나니 그런가 싶기도 하고. 원래 merger를 겪기 전 팀의 구조가 매우 단순했고 (경력 10년 이상의 Director, 경력 10년 정도의 시니어, 중간의 나, 그리고 주니어들), 새 회사의 hierarchy 구조에 비해 1-2단계 낮은 감이 있어 이를 감안해 다들 승진이 필요하기도 했다.


다만 팬데믹이 지속되고 있다 보니 차일피일 미뤄진 것이 1년 정도. 인터뷰 보자는 요청은 쌓여가고 회사 일은 늘 어딘가에 쌓여있고. 힘들어하는 동료들과 매일 집과 집 앞 공원만 회전하는 나의 하루가 지겹던 차에, 그 오퍼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여기에 쓸 수 없는 이유들까지- 세상엔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어디에나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영국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지요.


오퍼 받고 나가려고 한다고 했을 때, 휴가 중이던 내 전 회사의 보스이자 지금은 고위 임원인 이가 바로 이메일과 전화, 문자 메시지까지 보내서 설득을 했다. 진작에 잘하지 라는 말이 혀에 맴돌았는데, 한 마디에 흔들렸다. "나에게 세 달만 기회를 줘".


오호라, 결혼  아주  안되는 연애를  때에 (아내님 저는 정직합니다). 정말 아닌  같은 사람과 헤어져야겠다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을 해도  밖에  말을 꺼내지 못했던 우유부단, 쓸데없는 정에 휘둘리는, 굳이 이런 상황에 상대방을  배려해야 한다는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안되는 성격이 어디 가지 못해  말을 듣고 한들한들 나부끼는 나의 결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국인이지만 크로아티아 태생이며 미국에서 주로 자란 꽤 복잡한 이력의 소유자인 형과의 대화.




크로아티아 태생의 미국에서 자란 영국인 형: "그래서 새 회사가 지금 회사보다 어떤 점에서 좋은 것 같아?"


발모어책방: "가장 중요한 건 팀 분위기가 좋고, 사람들을 케어하고, stretched 되지 않게 관리를 해준다고 하더라구요"


크로아티아 태생의 미국에서 자란 질문이 날카로운 영국인 형: "그래, 좋은 장점이구나. 근데 회사에는 다들 출근한대?"


발모어책방: "아뇨. 제가 한 주에 한번 간다니까 안 그래도 된다고 하더라구요"


크로아티아 태생의 미국에서 자란 질문이 계속 날카로운 영국인 형: "그럼 사람들을 못 만나는데 팀 분위기가 좋은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발모어책방: "...으흥"




그렇게 회사에 남기로 결심을 하고 연말을 맞이했다. 팀이 나뉘며 EU팀 소속으로 영국에서 조금 더 대륙(?)의 클라이언트들을 놓고 일하게 되었다. 같이 팀이동을 한 팀장이자 친구인 녀석은 팬데믹이 끝나면 어디 밀라노에 같이 출장을 가서 와인을 마시고, 스톡홀롬에 출장을 가서 백야를 보자며 놀 계획부터 세운다. 연말에 한국에 여러 상황 때문에 갈까 말까 했더니, 프랑스인 보스가 영국 시간에 맞추지도 말고 일해도 된다며 갔다 오라고. 알고 보니 그는 남부 프랑스에서 이미 20년간 재택근무를 하신 원격근무의 설계자와 같은 분이었던 거. 덕분에 1달 반 간 일도 하고 쉬기도 할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와 10일간의 자가격리를 끝냈다.


올해 그렇게 뛰며 걷다 침전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 약간의 소동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그렇게 남기로 결정을 하고 brewmaster 친구가 만든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밤. 사실 오퍼를 받은 사실을 처음 알려준 것도 그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어떤 선택이든 지지한다고 했었다. 조금은 차갑지만 이성적인 친구의 반응에 참 너답다 생각도 했었는데.




친구: "(맥주를 후루룩 마시며) 사실 너가 나갔다면 우리도 다 나가려 했어" (우리=회사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들)


발모어책방: "(역시 맥주는 독일맥주지 하던 찰나에) 엥? 진짜?"


알고 보니 속정 많은 친구: "다들 네가 겪은 일들이 불공평 하다 생각했고, 너 나가면 우리도 감당이 안되는데. 그냥 우리 없이 해보라지 뭐."




사람 없는 영국에 그래도 어떻게든 필요하게 되어지고, 소용이 있다 여겨지며, 의미를 파생하며 살아간다. 돌아갈 때 달고나나 사가지고 가서 바늘로 같이 뚫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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