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양동에서 런던 홀본까지
처음 부동산 아줌마에게 동네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나른한 주말 오후의 햇볕을 상상했다. 따뜻하고 게으른, 나른하고 단순한. 실제 현실도 그리 멀리 있진 않았다. 아파트 7층 복도 제일 끝에 있던 집 베란다에선 한강이 5 제곱센티미터만큼 보였다. 주말 오후 햇살은 그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시골대학교를 나온 촌놈에게 딱 호사스러운 따뜻함이었다.
지루해지면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한 숨 크게 쉬면 침착한 한강의 비릿함이 코에 닿았다. 아직도 주말 오후 성산대교에서 가양대교로 향하던 오후의 자전거 길을 가끔 생각한다. 베란다 프로젝트를 들으며 집으로 가던 길. 아내를 영국으로 보내고 나는 더 고요해졌다.
내가 살던 가양동은 서울의 서쪽에 있어 9호선을 타고 도심으로 들어와야 했다. 그 길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김포와 인천에서 오는 사람들로 7시 반이면 가양에서조차 타기가 힘들었던 급행열차는 여전히 그러하다더라. 사실 북적였다는 표현이 화가 날 만큼, 밀려날 곳도 없는데 밀어붙여지고, 밀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찾지만 닿지 않는. 그렇다고 지하철 플랫폼에 멍하니 서있을 만큼 여유는 없는.
그래서 나 역시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서 지하철 역으로 뛰어가야 했고, 사람들 사이에 밀고 밀려야 했으며, 어두운 퇴근길을 걸어야 했다. 아마 퇴근길 호떡이 없었다면 더 우울했을 수도 있었겠다. 천 원에 호떡 2개를 주시던 아주머니는 여전히 그곳에 계실까.
사실 끽해야 좋아하던 작가들이나 책들로만 알던 영국에서 아이까지 가지며 살게 될 것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내의 유학 끝무렵, 아내 밥 해주러 휴직을 했다. 조직 내 어쩔 수 없던 내 선택이 각자에게 다르게 해석된 것을 알게 된 때이기도 했다. Euston Square 근처 아내의 자취방은 1인용 침대 밖에 없었는데 이상하게 좁지만 좁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건 영국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이 곳의 수백 년씩 된 도로들과 거리는 한국의 그것과 달리 꽤나 좁고 울퉁불퉁하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아슬아슬한 느낌을 가질 때가 참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다리며 양보를 한다. 아이가 서 있으면 차를 멈추고 지나가라 신호를 준다. 차선 하나뿐인 도로에서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멈춰서 기다린다. 불편함은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그 배려는 해가 일찍 지는 이 곳의 겨울에서 따뜻한 햇살과 같다.
그 안에서 조금 웃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웃는 일들을 조금씩 기록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lizabeth line을 타고 윈저로, Central line을 타고 홀본으로 가는 이 길 위에 가끔 멈춰 서서 멍하니 있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