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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모어책방 Jan 19. 2020

나는 왜 정말 영국에 왔는가

 모호한 첫 글에 대한 모호한 자기 변명

How did you end up here?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광고 카피 같은 이 질문은 이 곳에서 이방인인 나에게도 종종 던져지는 질문이다. 대답은 늘 어렵고 다르다. 그 사람과 대화하던 context에 따라서도 다르고 그 질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서도 다를 수밖에 없다. 아시아의 웹사이트 하면 지저분하고 복잡한 UX만 떠올리는 나의 동료 E에게는 뭔가 내가 자라온 곳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기 싫다. 반면 친근한 J에게는 Work & Life Balance 같은 키워드로 설명하지만, 쉬운 설명이 성에 차지 않는다.  


왜 하필 이 곳에, 지금. 


답이 어려운 건 오늘이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한다. 오늘의 나를 내가 별로 꿈꿔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대구에서 나서 대구에서 죽을 줄 알았다. 포항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강원도 산골마을에 들어갈 생각을 자주 했고, 서울에서 일을 하며 살 줄 몰랐다. 서교동 반지하에서 일하며 살 때는 서울에서 내 집을 갖고 살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20대여서, 가난했기에 작은 것들에도 절박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경험 끝에 간절해지지 않기로 결심했고 그랬더니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더 좋은 그림들이 그려졌다. 그래서 영국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어느 여름날을 남들처럼 운명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Euston에 있던 자주 가던 낡은 카페에서- Ed의 노래가 흐르며 햇볕이 머그 위로 쏟아지던 그 시간 이 곳에 남겠다 결심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내겐 없어서, 이토록 구구절절 있었던 일을 설명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원했다


나는 선택의 문제에 있어 꽤 게으르고 나른한 편이다. 그런 내게 아내는 선물과 같다. 아내는 즉흥적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결정들을 잘 내려준다. 뭘 먹을지, 어디를 놀러 갈지, 뭘 하고 놀 지. 연애를 할 때도 내가 하는 일은 주로 선택의 옵션을 주는 것이었다. 유학 역시 아내가 원한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나는 늘 그렇듯 옵션들을 줬고 결정은 내려졌다.


건축가이던 그녀가 오랫동안 원했던 일은 유학을 가는 일이었다. 건축가로서 한국에서 일을 한다는 것의 어려움은 아내와 연애하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충분히 지켜볼 수 있었다. 전날까지 밤을 새우다시피 도면을 그리던 아내는 나와 함께 걷는 일요일이면 위통으로 힘겨워했다. 맛있게 식사를 했어도 자주 체했고 화장실로 달려가 게워내곤 했다. 대학 시절 감기조차 걸리지 않고 (본인의 표현대로) 타고난 건강함을 자랑하던 그녀는 그렇게 시들어갔다. 그것이 결혼 후에 어떤 모습 이리라는 것은 굳이 우리가 상상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어느 봄날. 아마 벚꽃이 떨어졌던가.


"영국에 있는 학교에도 지원을 해야겠어"

한동안 지원서를 내느라 잠을 잘 자지 못하던 그녀는 피곤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영국?"

"응. P소장님이 영국에서 석사를 하셨는데 좋았다고 하셨어. 학교들 랭킹도 나쁘지 않고"

"그래도 너무 갑자기 아냐?"

나는 먹다 만 밥을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조금은 갑작스러웠기에.

그녀는 그런 나를 보지도 않은 채 이야기했다.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일단 해보려고"


1년의 준비기간에 비해 방향을 선회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실패라는 경험의 가치를 내게 알려준 사람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망설일 때마다 '한 번 해보고 안되면 그때 생각해보지 뭐. 그래도 배우는 게 있지 않을까'라며 무모함을 종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신념을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영국은 그런 그녀가 원했던 곳이었고 여름이 가기 전 아내는 히드로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상대적으로 느릴 뿐


아내의 유학은 치열했다. 그녀는 영국의 살인적인 물가를 견뎌내며 도시락을 싸면서 지냈고, 나는 한국에서 얼마 되지 않는 생활비를 보내느라 튀니지 출장에 논문 같은 보고서에 새벽에 퇴근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아내 유학 끝무렵에 아내 밥해준다는 핑계로 영국에 왔을 때, 저녁시간의 한산한 거리가 어색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게다. 화려했던 나의 도시와 달리 그녀의 도시는 밤이면 적막했다. 사실 아내의 집과 도서관이 있던 Euston은 런던의 꽤 중심가였다. 대학도 있고 고급 사무실들도 즐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 7시면 어둑해진 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웠다. Main street에 있던 스타벅스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8시면 문을 닫았다. 그 시각 네온사인에 더 힘을 주고 찬란하게 빛나는 서울의 밤은 점점 우리게 멀어져 갔다.


영국에 남게 된 것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내가, 우리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아내와 함께 하기를 소망했던 많은 것들이 가양동과 그녀와 걷던 서울의 거리들에 여전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낯선 도시와 사람들 사이에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어쨌든 우리 모두 각자의 상대성의 법칙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택시만큼이나 빠른 그곳의 속도는 우리에게는 다소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남들만큼이나 빠르게 살기 위해 9호선 급행열차를 매일 아침 올라야 했지만 그게 나에게는 불편했던 것처럼, 우리가 속해있던 공간은 우리의 시간에 의해 상대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영국이 우리의 속도에 조금 더 맞았던 것뿐이다. 그리고 감사하게, 또는 '은혜롭게', 우리에게는 그 공간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뿐이었다.


한 번은 인터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런던의 Tube 중 가장 복잡한 Central line을 탄 적이 있다. 퇴근 시간이긴 했지만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이건 왠 걸? 이미 앞선 역들에서 사람들로 꽉 차서 왔기에 탈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밀어서 탈 수 있는데 앞 선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다. 다들 아쉬운 표정을 하고는 다음 열차를 기다린다. 기껏해야 퇴근시간 2호선 서울대역 정도의 혼잡도일 뿐인데 말이다. 몇 번을 그냥 보내고 겨우 타서 Paddington으로 가던 길, 한 편 웃음이 났다. 열차가 꽉 차서 오면 한 숨을 푹 쉬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영국 사람들 특유의 답답함이 느껴지기도 했고, 퇴근길 고속터미널역에서 나던 곡소리도 대비되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답답해도 이들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모두 이기는 게임을 선택했고, 우리는 모두 지는 쪽을 선택했다.


풍요로부터


"재호, 한국으로 갈 거야?"


동료 K가 묻는다. 최근 회사가 합병되면서 한국지사가 생긴 셈인데, 덕분에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 연말에 한국에 와서 보니 편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웠다. 처가가 있는 망원동은 몇 년 사이 매우 유명(?)해져서 곳곳에 맛집들로 넘쳐났다. 아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소품을 파는 가게들도 있었고 영국에서처럼 어디에서 커피를 마셔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시차 때문에 새벽 2시에 아이와 함께 일어나 있을 때 배가 고파져도 치킨을 배달시킬 곳이 있었다. 핫도그도 맛있었고 돈가스도 맛있었고 돼지갈비도 맛있더라. 만 원에 직화 오삼불고기와 순두부찌개, 계란말이까지 주는 소공동은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런치로 먹은 5만 원짜리 3코스 식사보다 낫더라. 동네에 이런 거 하나만 있으면 싶은 것들이 넘쳐났다.


한국에 있으면서 다녔던 회사들에는, 그다지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했던 나에게도 커피도 사주시고 선물도 주시는 분들이 계셨고. 각자 바쁜 가운데 나와서 밥과 커피를 사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시간이 빌 때마다 나와서 치킨도 같이 먹어주고 피파도 같이 해주는 오랜 친구도 있었는데. 그리고 영국에서는 우리 둘 만이 줄 수 있었던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족들에게서 넘치는 것을 보며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이 저절로 피어났는데.


돌아왔다, 다시 이 곳으로.


그립지 않은 것은 그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택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그것과 달리 이 곳은 최소한의 무엇만 갖추고 있다. 만 오천 원이면 싸다고 생각되는 외식 비용 때문에 이 곳의 사람들은 집에서 식사를 하고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에 익숙하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튀기고 찌는 것 외에는 솜씨가 없는 이 곳 음식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이 곳 사람들은 내 손으로 손님을 먹이는 것의 기쁨을 안다. 내가 편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새벽 2시의 음식이 가진 무게감을 모두가 공유한다. 아 단 하나 모르는 것은 맛있는 커피와 맛없는 커피의 차이점이겠지.


그래서 풍요롭지 않지만 모두가 필요한 것 이상을 꿈꾸지 않는 이 곳으로 돌아왔다. 가족과 저녁을 먹을 시간, 아이와 충분히 놀고 씻기고 재울 시간, 주말이면 산책 나갈 집 앞 공원, 외국인 노동자인 나를 차별하지 않는 동료들, 대충 세우는 휴가 계획, 차를 좋아하는 아이가 손을 흔들면 차를 멈추고 웃어주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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