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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모어책방 Feb 02. 2020

이웃 그리고 동네

떠나기 어려운 이유

이웃


이웃이란 얼마나 낯선가. 아니 어쩌면 낯설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씨족사회를 지나 오늘에 이르면서 더 이상 내 벽을 마주한 사람들이 가족 또는 친척들이 아니게 되었다. 도시는 심지어 이웃을 이름으로 알지 못하고 104호, 507호라는 번호로 누군가를 기억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다. 공동노동과 잔치로 얽혀 있던 이웃 간 이야기는 이젠 은밀히 시멘트 벽과 공기로 전달된다. 나의 지난 이웃들 역시 여름밤이면 더운 밤공기에 담배 연기를 싣기도 하고, 겨울밤이면 얕은 원룸 벽 사이로 은밀하고 위대한 사연들을 전하곤 했다. 나의 이야기도 101호, 203호, 710호의 어느 벽 틈으로 누군가에게 남았겠지. 반지하에서 아파트 7층에 이르기까지, 번호가 올라간 만큼 이웃으로서 나는 더 나은 이야기를 전달했을까. 자신이 없다.


아이가 3개월쯤 되었을 때의 일인 것 같다. 8월을 지나면 영국의 주말 오후는 단순해진다. 해가 짧아지고 상점은 4시면 문을 닫는다.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우린 해가 지기 전 다짐이라도 하듯 산책을 나가곤 했다. 그 날은 옆동네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 더 꼼꼼하게 문을 잠그고 나섰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 Sonning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가을 강변의 낙엽내음 섞인 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우리는 유모차를 밀며 고단하게 쌓여있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그 시간을 사랑했다. 아이도 도란도란 엄마아빠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쉽게 잠이 들곤 했다.


그 날은 무슨 일인지 아이는 길을 다 가다 못해 Lido Spa 즈음에서 칭얼대기 시작했다. 아이를 기르며 배운 것은 빠르게 가던 길을 돌아서는 법이다. 우리가 가고 싶었던 길보다 아이가 행복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배움이었다. 서둘러 집 앞에 도착해서 열쇠를 문에 넣고 돌리는데, 이런. 문이 열리지 않는다. 분명히 문을 잠그고 나올 때와 같은 열쇠인데. 혹시나 해서 옆집에 양해를 구하고 담을 넘어서 후문으로 가봤는데, 나는 불필요하게 철저했다. 열쇠집에 연락해보니 문을 부수고 새로 만드는데 20만 원쯤을 부른다. 주말이고 영국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20만 원이라니. 혹시 집주인에게 여분의 열쇠가 있을까 해서 급히 연락해보니, 멀리 나와 있어 가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라 한다. 그 사이 피곤함에 지친 아이의 울음소리가 거리에 퍼졌다. 난감함에 아내는 하릴없이 문 앞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20만 원이라도 문을 부숴야 할지, 막연하게 집주인을 기다려야 할지. 왜 이 열쇠는 들어올 때 나갈 때 생각이 다른 지. 왜 우리는 그 날따라 여분의 열쇠를 챙기지 않았는지. 복잡한 마음이 그림자를 따라 길어지는데 길 건너편에서 우리 아이 만한 아기를 안고 어떤 엄마가 걸어왔다, 맨발로. 우리 집에서 차 한 잔 하면서 기다리지 않을래, 맨발의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이 곳에서 예의 말고 호의라니. 낯선 이의 호의를 반가워하지 않는 내가 주저하는 사이, 아내는 냉큼 그러겠노라며 일어섰다. 나는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나의 두 발이 제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두 사람은 재빠르게 서로 인사를 나누며 내 시야에서 멀어진다. 그게 지금은 친구이자 가장 가까운 이웃 A와의 첫 만남이었다.  


우리 아이보다 1달 늦게 태어난 아들이 있는 A는 독일에서 온 친구였고 스코틀랜드 출신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이 곳에 정착했다. 그 남편 B 역시 일본에서 영어교사 일을 1년 정도 했던 터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에 친숙함이 있었다. 한국도 한두 번 여행을 해봤다 했다. 그래서 여행 이야기, 비슷하며 다른 두 나라 문화 이야기, 약간의 직장 이야기 등을 나누며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관계의 시작점은 공감대일 수밖에 없다. 이 낯선 나라의 낯선 이웃들에게도 '아이'라는 공감대는 근본적인 것이었고, 아내는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A와 절친이 되었다.


어떤 날 (또는 매일 아침).


"아내 뭐해? 나라 (아이의 태명) 오늘은 잘 잤어?"

"응 일어나서 A랑 카페 와서 커피 마시고 있었어"

(일하는 남편 약오르지 커피 사진 띡)


어떤 오후 (또는 매일 오후).


"아우 피곤하다...아내 뭐해? 나라랑 산책하나?"

(꽤 맛있어 보이는 빵과 아기 사진 띡)

"응 A가 자기가 빵 만들었다고 같이 차 마시자 해서 지금 와 있어"


여기에 보츠와나에서 온 C까지 가끔 합세해 1시간 반 거리의 Sonning까지 유모차를 끌고 다녀오질 않나, 아내의 1년 동안의 육아휴직은 거의 이 낯선 이웃들과 함께였다. (심지어 아내는 A의 시어머니와도 친해졌고, 그분은 손자를 만나러 몇 시간 기차를 타고 오시면서 우리 아이의 선물까지 매번 챙겨주시곤 한다) 때로는 남편이어서 다 잘 헤아려주지 못했던 마음까지 서로 다독이면서 보냈기에 아내는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아이의 첫 생일 때 A는 1년 동안 두 아이와 엄마들이 함께 했던 시간을 앨범으로 만들어 아내에게 선물했고, 두 사람은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서로를 한참 동안 껴안고 있었다. 나는 육아휴직이 행복했다고 말하는 아내와 그녀를 둘러싼 이웃들 중 무엇을 더 낯설어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동네


한참 여기 와서 제품을 만들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는 개발 속도는 내 마음 같지 않았고 불규칙적으로 시간이 빌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한국이 밤으로 접어드는 오후에는 동네 강가를 뛰었다. 영국 여행을 오면 런던에서 만나게 되는 Thames 강은 우리 동네를 거슬러 저 멀리 서쪽 Cirencester 인근 Thames Head에서 발원한다. 하류만큼 넓지 않지만 여름이면 적절한 강폭을 진동하며 바람이 대지를 훑고 지나갔고, 나의 뜀박질은 그러한 역풍을 즐거워했다. 가을이면 영국 사람들의 모호한 감정 표현만큼이나 불분명한 낙엽들이 음습하게 깔렸는데 그것이 또 지나치게 바스락 대지 않아 좋았다. 애써 둔해지려 하는 나를 잘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 시절 내가 더 좋아했던 것은 집 뒷동산 Balmore walk였다. 정체불명의 작물들을 기르는 밭과 병원 사이로 난 가파른 계단을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왔다. 기껏해야 4층 건물만큼 높을까마는, 이 언덕에 서면 내가 사는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건축가였던 아내는 그 감정을 Human scale이라는 표현으로 즐겨 설명했다. 우리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을 적정한 높이와 크기의 집들에서 오는 친근한 노래들. 늦은 오후 해가 질 때 즈음이면 잉글랜드 남부의 낮고 긴 햇살이 그 촘촘한 거리 위에 잔잔히 어깨를 드리웠다. 그러면 쉴 곳 없는 이방인인 나도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댈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카페 Siblings Home이 그 아래에 있던 시절, Flat White를 하나 들고 오르면 기분이 좀 낫던 시절. 마음 같이 되는 일이 없어도 그 언덕에 올라 한적하게 길을 걷다 보면 즐거워지곤 했다. 좋은 길이 주는 유익이었다.


아이가 걸을 때 즈음부터는 Caversham Court Garden을 사랑했다. 처음 이 곳에는 12세기 즈음 수도원이 세워졌었고 교회를 지나 어느 부요한 상인의 집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동네 주민들의 쉼터로 쓰이고 있다. 반대편에서 보면 가장 위에는 St. Peter's Church의 첨탑(이라 하기엔 뭉툭한)이 scale 감을 더하고, 가장 아래는 Thames 강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 다른 영국식 정원들보다는 덜 가꿔진 감은 있지만, 어느 할머니가 소박한 마음으로 조금씩 씨를 뿌리고 계절의 변화를 간혹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만든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곳은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가득한 Friends of Caversham Court Garden이라는 모임에서 관리한다) 그래도 엉성하지 않은 건 정원에 횡으로 펼쳐진 세쿼이아 나무들 덕분이다. 1800년도 식민지들에서 자라던 큰 나무들을 들여왔던 당시 트렌드를 따라 심겨진 나무들이 1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름이면 그 그늘 아래서 시원한 강바람을 느끼며 앉아 있으면, 카약을 타고 사람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가을이면 손바닥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을 느끼며 겨울 전 마지막 따뜻한 잔디를 쓰다듬곤 했다. 아이는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들고 종종 마법사가 되었다. 요즘은 뭐라뭐라 말하며 마법지팡이를 휘두르는 아이의 주변으로 백조가 날아들고 오리가 날아든다. 우리도 마법에 걸린 건지, 머리가 띵해질 때까지 웃게 된다.


그래서 이사 가기가 어렵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긴 글을 써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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