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도 다를 바 없는
2019년 4분기를 돌아보면 정말 바쁘고, 재미없는 업무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여행기자가 아닌 한 명의 사무직원으로서 거의 매일 야근을 하며 저녁 없는 삶을 보냈고, 자연스레 여행과도 멀어졌다. 그나마 12월이 막 시작했을 때 라스베이거스 CES2020 출장이 잡혔고 숨통이 살짝 트였다. 12월도 만만하지 않았지만 미국 덕에 새로운 1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2020년 1월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2020년의 첫 출장이었다. 장거리 비행을 즐기는 편이라 목적지로 가는 기내부터 이미 여행이 시작된 셈이다. LA를 거쳐 라스베이거스에 반나절 만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본 LA 해변의 일몰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라스베이거스 일정이 워낙 빡빡해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못했지만, 판다 익스프레스, 쉐이크쉑, KFC, 피자헛 등 한국에 있는 프랜차이즈의 미국 현지의 맛을 즐길 수 있어 나름 좋았고, 카지노도 살짝 맛봤다. 관광지라 와인 가격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좋은 와인들이 저렴해 마음껏 구매한 것도 큰 이득. 미국 특유의 IPA도 많이 마셨다. 다만 여행 및 관광 측면으로 봤을 때 라스베이거스는 영 내 취향은 아녔다. 테마파크처럼 무언가 작위적인 도시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올해 가장 뿌듯했던 시간으로 남은 건 온전히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CES 2020 덕이다. 우리 생활과 미래를 바꿀 다양한 기술을 뉴스가 아닌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봤다. 또 삼성전자, 현대차 등 대한민국 대표 기업과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의 CEO의 키노트가 인상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델타항공이 기억에 남는다. CES에 처음으로 여행과 관광 관련 카테고리가 별도로 생겼고, 항공사 최초로 키노트에 참여했다는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더해서 델타항공의 키노트 내용과 부스 등 모든 게 수준 높았다.
특히 델타항공이 꿈꾸는 미래 항공 여행을 주목할 만하다. 키워드는 언택트다. 탑승객이 항공사 직원과의 만남 없이도 편하고, 빠르게 탑승할 수 있는 과정을 마련하는 게 핵심이다. 기술이 이를 가능케 한다. CES 2020에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디스플레이 혁신 기술 '평행현실(Parallel Reality)'이 큰 축을 담당한다.
평행현실 디스플레이를 활용하면 전광판에 특정 개인의 정보만 띄울 수 있다. 예를 들어 100명이 똑같은 전광판을 보더라도 항공사는 A고객의 생체정보와 체크인 정보를 활용해 A에게 필요한 정보만 제공할 수 있다. 부스에서 직접 체험도 했는데, 4명이서 똑같은 전광판을 보더라도 내용이 달랐다. 사실 델타항공은 올해 여름 디트로이트공항에서 이 기술을 구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 확인은 못해봤지만 코로나19로 미뤄졌을 것 같다. 하루 빨리 상황이 나아져 여행 관련 기술에 대한 투자도 다시 활발해졌으면 한다.
다음은 2월 출장이자 올해 마지막 해외 출국이었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발릭파판. 분명 올해 다녀왔는데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한-아세안센터와 함께 ‘모던아트투어’, ‘힐링투어’를 주제로 수도 자카르타와 새로운 행정수도로 지정된 동칼리만탄을 방문했다. 2월 중순에 방문했는데, 인도네시아는 코로나19가 유행하지 않은 시기였다. 인천공항과 비행기 내에서만 마스크를 썼지 인도네시아 일정이 시작된 후에는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현지인들 중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이유. 날씨가 후텁지근하다 보니 착용하려 마음 먹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다녀와서 1~2주 긴장하긴 했으나 삼각대 추가 수하물 사건을 제외하고는 무탈하게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항상 삼각대도 기내 반입을 했는데 가루다인도네시아항공, 중국 항공사 등은 기내 반입이 안 된다고 한다. 신경 쓰지 못한 내 잘못이 우선이지만, 자카르타 공항 내 가루다항공사 직원들의 일처리도 원활하지 않았다. 1kg도 안 되는 추가 수하물 맡기는 데 30분 이상 걸려 라스트콜에 내 이름이 불렸고, 기준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27만원을 부과했다. 일단 출발해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카드 결제... 다행히 발릭파판에 도착해 항공사 착오라고 환불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 진행은 자카르타에서 하라고. 3일 뒤 자카르타에 도착해 환불하려고 했더니 자기들은 전달받은 게 없다고 해서 환장. 또 30~40분 추가로 뺑뺑이 돈 이후 2~3일 내 처리해준다고. 기분이 묘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행 안 됨. 결국 출국날 가서 겨우 겨우 처리. 한국어 가능한 인도네시아 가이드분이 도와줘서 인도네시아 출국하는 날 환불 영수증을 받았고, 3주 뒤에 카드사 환불 처리가 완료됐다. 나름 여행 고수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좋다. 4년 전 발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다. 이번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강렬한 추억을 선사한 건 '오랑우탄'. 발릭파판에서 위쪽으로 2~3시간, 삼보자(Samboja) 지역에 있는 삼보자 레스타리에서의 만남은 강렬했다. 수풀 속에 웅크리고 앉은 갈색 털 코트를 입은 생명체. 고개를 돌리니 육중한 몸매로 나무를 타는 오랑우탄이 눈에 들어왔다. 가히 충격적이었다. 계속 보니 묘한 기분도 들었다. 동물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모순적인 감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강아지, 고양이 등을 볼 때와 확실히 달랐다.
마냥 신기하기만 한 것 아녔다. 연민도 느꼈다. 이곳은 보르네오 오랑우탄 생존 재단(BOSF, Borneo Orangutan Survival Foundation)이 산림개발과 사냥 등으로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한 오랑우탄들을 구조하기 위해 만든 열대우림이다. 현재 122마리의 오랑우탄과 62마리의 선베어를 보호하고 있다. 동물을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게 목표라 동물원과는 지향점이 다르다. 설명을 듣고 나니 그저 동물원 온 것처럼 구경하던 마음가짐부터 고쳤다.
인도네시아 이후 3월 체코, 5월 독일, 오스트리아 등 일정이 있었지만 코로나19로 취소됐다. 예고도 없이 해외여행과 갑작스럽게 이별했다. 사람과의 이별 경험이 많지 않아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이번에 간접적으로느끼게 됐다. 괜히 우울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기저에는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실 2020년을 돌아보면 해외여행이 사라진 것 빼고는 전체적으로 괜찮았다. 건강 회복에 충분한 시간을 들였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 게다가 저축을 충분히 했고, 주식을 통해 금융문맹도 탈피했다. 하지만 해외여행이 없는 일상 탓에 온전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원하는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닌 것 같다. 12월도 그렇고, 2021년도 해외여행 없는 일상을 잘 이겨낼 방법을 찾는 데 힘을 쏟을 것 같다. 어떤 게 있을까?
코로나19로 해외여행 길은 10개월째 꽉 막혔다. 여행의 아쉬움을 풀기 위해 국내여행은 갈 수 있을 때마다 짧게라도 다녀왔고, 콘텐츠 생산을 위한 출장도 덩달아 늘었다. 해외여행의 갈증을 온전히 털어냈다면 거짓말이지만, 여태 보지 못했던 한국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돼 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시작점은 여수. 1월20일 국내에 첫 확진자가 생기고, 2월 대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음에도 여수의 봄을 담기 위해 출장길에 올랐다. '여수 밤바다'에 힘입어 전라도 최고 관광지로 자리매김했지만, 2008년 대학 동기 만나러 간 이후 12년 만에 방문해 색다르게 다가왔다. 코로나19라는 변수가 있어 불안함이 가득했으나 역시 여행은 여행. 석천사를 시작으로 오동도, 해상케이블카, 돌산대교, 남산동, 이순신광장, 향일암까지 하루 동안 주요 포인트를 모두 돌고, 여수 밤바다를 들으며 종포해양공원을 걸으니 피날레까지 완벽했다. 날씨까지 모자랄 게 없어 여수의 예쁜 3월을 오롯이 눈에 담고 왔다.
다행히 4~7월 국내 코로나19 상황이 비교적 호전돼 국내여행이 활발해져 돌아다니기 수월했다. 이 기간에 출장겸 강릉, 부산, 제주, 영주, 태안, 부산을 마스크와 함께 누볐다. 강릉과 제주, 부산이야 우리나라 TOP 3 여행지라 언제 봐도 멋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크게 색다르진 않았다. 반면 영주와 태안은 첫 방문이었고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 이상의 모습을 선사했다. 특히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이후 방문한 신두리 해수욕장의 소와 송아지 모습이 뚜렷하다. 해변에서 우렁이를 본 것도 신기했는데 어미 소와 송아지가 모래밭을 거닐고 있다니.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평화로움이 스위스와 비교해도 부럽지 않을 정도.
영주의 경우 부석사가 압도적이었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절이라 기대가 정말 커서 걱정도 됐다. 그렇지만 부석사는 이 하찮은 중생의 우려를 가뿐히 뭉갰다. 배흘림기둥의 무량수전을 필두로 모든 사당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최고의 풍경을 선사했다. 무량수전에 서 바라본 소백산의 산새도 으뜸이다. 가을로 물들기 직전의 부석사도 이리 훌륭한데 계절의 절정을 달리는 4~5월, 10~11월, 1~2월에 방문하면 어떨까. 사계절 모두 영주를 방문해야 한다면 단연 부석사 때문이다.
참 부산도 뻔하다고 했는데, 가덕도는 확실히 달랐다. 부산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30분 이상 걸리지만 꼭 한 번 가보기를 추천한다. 부산의 화려한 이미지와 다르게 우리가 몰랐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숨겨진 곳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양포, 새바지항 등 일본의 잔재가 남은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볼 수 있고, 2~3시간 정도 투자해 연대봉에 오르면 가덕도의 광활한 풍경을 마음에 새길 수 있다. 이밖에도 가덕도등대, 대항항, 정거마을도 들를 만하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의 일몰은 소문대로 엄청났다. 1호선 종점이라 조금 멀지만 2~3회차 부산여행이라면 하루의 마무리를 다대포의 일몰로 꼭 해보자.
서울도 다시 봤다. 1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지만 식당 투어를 제외하고는 카메라로 담는 데 인색했다. 이번에 서울관광재단과 함께 온라인 사진전을 진행했고 몽촌토성과 세빛섬 취재를 맡았다. 몽촌토성과 올림픽공원은 집에서 멀지 않아 자전거를 이용해 종종 방문하는데 진지하게 구경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몽촌토성 3시간, 세빛섬 1시간30분 정도 충분히 시간을 들였고, 곳곳을 사진으로 담았다. 월요일 아침, 한적한 몽촌토성은 파란 하늘과 어울려 꽤나 예뻤다. 마스크 착용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진 못했지만 다음 방문을 기약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촬영이었다.
8월 2차 유행으로 8~9월 말까지 거의 집콕 생활을 했고, 10월 2차례 부산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뒤이어 바람이 차가워진 11월의 강릉을 마지막으로 올해 여행을 마무리했다. 사실 12월에 1~2번 정도 2020년을 정리하는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코로나19가 또 찾아왔다. 고로 12월은 조용히, 그리고 얌전하게 보낼 것 같다. 귤을 옆에 두고 따뜻한 이불속에서 지나간 여행들을 찬찬히 돌아볼 예정이다. 여행이 한없이 부족했던 2020년, 구체적인 희망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아 조금 서글프지만 2021년은 지금보다 더 나은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업무 외로 글을 쓰는 게 힘에 부치지만, 여행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이 공간에 마음이 간다. 스토리 업로드가 많지 않음에도 지속적으로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구독자와 네티즌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가 감당하기엔 쉽지 않았던 2020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2021년 더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