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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 Aug 25. 2020

[서평]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최근 며칠간 이 책에 푹 빠져 살며 읽고 먹고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사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 더 급급했던 1920~30년대생 여성들의 생애 구술사가 그리도 재미났다. 아니 사실, 생존이 급급했던 그들의 삶은 절대 달디달 수 없었지만, 그들의 생애 굽이굽이를 말과 기억을 따라 읽어내는 과정이 달디달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안했고 또 너무나 재밌었다.


 '역사'는 '공식적인 기억'이다. 역사 교과서 속의 '국민들'은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을 하고 한국전쟁기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산업화 시기엔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노동하고 독재 시기엔 민주화 운동을 한다. 그러나 과연 모두가 그러했겠는가? 싱글맘 빈민, 양반 출신 중산층, 실향민 등 다양한 계급의 세 여성은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얽히고설키며 또는 공식적 기억에서 빗겨 나가기도 하는 삶을 살아온다. 그러나 이들의 기억은 역사로서 호명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공식적 기억 속 '국민'의 젠더는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흐릿한 기억과 불투명한 언어로 더듬더듬 구술된 그들의 기억이 기록된 이 책이 값지다. 분명 역사였을 진데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그네들의 삶은 공식적인 기억에 다양성을 보태는 기록이자 남성 국민만의 역사, 즉 히스토리(history)를 상대화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1920~30년대생 여성인 이들의 구술사를 읽다 보면 '의외인 역사'가 흥미롭다. 과거일수록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고 정조가 중요했을 것 같지만 꼭 그렇기만 하지도 않다.  1925년생 김미숙은 전후 한국 사회에서 홀로 양키 장사를 하며 미군과의 동거, 연애 등 섹슈얼리티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산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제대로 그 맛을 느껴본 적이 있어. 캬바레 댕기면서 만난 한국인 대위였는데, 정말 잘하더라구. 근데 그거루만 사는 거 아니니까 더 미칠까봐 빨리 떼뻐렸어. 더 미치면 못 떼잖아.

그 과정에서 임신과 낙태를 경험하는데, 후에 목사가 된 아들이 찾아와 이것을 회개하라고 권하자 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콧방귀를 뀐다. 자유로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문란하다고 낙인찍고 멸시하는 사회에 맞서, 심지어 아들의 비난에도, 나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는 이 자존감 높고 당당한 여성을 읽다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지랄을 하고 자빠졌어. 다른 회개라면 할 거 많아두, 난 그 회개는 안 나와. 나도 예수 믿지만, 난 그런 게 별루 죄라고 생각이 안돼. 여자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한 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렇게 임신된 거를 다 낳았어 봐. 그걸 누가 책임지고 키울 거야?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




오로지 새끼들 안 굶길라고 기를 쓰며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본 것이 나 살아온 전부여. 근데 아무리 혀도 새끼들을 늘 굶기고 배고프게 할 수밖에 없었어.

 한편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김복례의 생애 굽이굽이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숨 쉬듯이 먹이려고 하는 할머니 세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927년생 김복례는 매독 후유증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새살림을 하는 남편은 가끔씩 찾아와 자식을 만들어 놓고 가도 돈 한 푼 보태주지 않았고, 홀로 남은 그녀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키운다. 그러나 빈곤 그 자체보다 사람에 의한 상처가 더 쓰리고 아프다. 딸을 외가댁에서 재우면 올케가 아침밥이라도 먹여서 학교 보내지 않을까 싶어 맡기면, 늘 밥 한 끼 챙겨주지 않던 올케, 친정 어머니에게도 끼니를 챙겨먹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없던 기억 등.

외갓집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믄, 할머니 밥만 가져오는 거여, 느그 외숙모가. 나는 빈 배에 갔드라도"야, 먹었시유!"그라고 답을 하제. 엄만데도 안 먹었단 말이 나오지가 않더라구. 그 채로 일하다 보믄 배가 고프고 고파서 창사가 달라붙어

그럼에도 김복례는 상처주는 사람들보다 따뜻하게 응원해주는 이웃들에 기대어 빈곤을 버텨낸다. 그러나 자신과 달리 남편에게 사랑받길 바라며 시집보냈던 첫째 딸이 남편의 가정폭력을 겪게 되자,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70년대 서울로 이주한다. 도시의 빈곤 노동자가 된 그녀는 성수동 땅굴 집에서 거주하며 확장하고 개발되는 서울을 목격한다.


차라리 나처럼 없는 게 낫당게

 한편 이들 모두 생애사에서 '생계부양자 남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미숙의 남편은 일찍 죽었으니 그렇다 쳐도 김복례의 남편은 두 집 살림을 하며 보탬이 없었다. 안완철의 남편은 국문학 석사였지만 시골 국어교사 자리를 잃고 서울에 상경하면서부터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근대 사회에서 남성성 수행의 핵심은 '생계 부양'이다. 그렇기에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젊은 남성들의 여성 혐오 형태는(여성 혐오는 2000년 가부장제 이래 언제나 존재했다. 다만 당 시대의 정치·경제·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형태가 바뀔 뿐이다.) '생계부양의 불능'에서 비롯되었다. "자신들이 취업이 어려워 이전 세대 남성들처럼 생계부양도 할 수 없는데 여자들은 명품백을 탐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더치페이를 하지 않다니"가 신자유주의와 접목한 2000년대의 여성 혐오 풍경이었다. 80년대 남성들은 자신들이 회사에서 힘들게 일해도 아내는 집안일 안한다고 '바가지 긁을 정도'로 부권이 떨어졌다며 이전 세대 남성들, 즉 아버지 세대의 가부장적 권위를 그리워한다(<한국의 가족과 여성 혐오 1950~2020> 참고) 하지만 1950~60년대의 남성들은 생계부양에 의한 가부장적 권위는커녕, 축첩과 가정폭력, 도박 등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시기였다. 바로 5~60년대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남성들이 김미숙, 김복례, 안완철의 남편이 속한 세대이다. 현재의 20대 남성들과 중년 남성들이 그리워하는 가부장적 생계부양자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계부양을 하지 않으면서도 가부장적 권위를 틀어쥐었던 남성들이 존재했을 뿐이다. 남성성 수행은 곧 생계부양이라는 신화가 허구임을 그녀들의 삶이 증명한다.


 이들의 삶은 공식적인 역사로 기억되지 않으나 한국의 정치적 맥락과 맞닿은 생애사이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역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His story만이 History로 기록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역사가 아닌 사적 기억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 최현숙은 '할머니들의 기억'을 젠더와 계급,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직시하며 역사로서 기록한다. 더불어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인터뷰하며 가정폭력 가해자였던 아버지 또한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 피해자였음을, 삶의 목표가 좌절된 한 인간이자 헤게모니적 남성성에서 겉도는 돌봄 지향적 남성이었음을 발견하며 아버지에 대한 시각을 입체적으로 완성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작가 자신이 아버지를 용서해가는 과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진한 치유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한다. 날숨과 들숨이 겹겹이 쌓인 듯, 살아있는 이야기들이 숨 쉬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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