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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May 23. 2021

미숫가루와 양철 그릇

유년기에 알아버린 새참의 참맛

꼬마 시절, 더운 여름이면 엄마는 종종 부엌 찬장에서 넓은 양철 그릇을 꺼냈다. 양철 그릇에 미숫가루 가득, 물 많이, 꿀 조금 그리고 얼음 두 알을 넣고 은수저로 휘휘 저었다.


꿀 대신 설탕을 넣으면 수저로 휘저을 때마다 설탕 가루들이 바시락 바시락 거리며 그릇을 간지럽게 긁었다. 그 사이에 동동 띄워진 얼음들도 그릇에 정신없이 부딪히며 맑은 종소리를 냈다. 그 소리만 들어도 어찌나 달고 시원하던지, 지금도 어디선가 양철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때면 입 안에서 미숫가루 맛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미숫가루 물은 우리 삼 남매에겐 새참과 같았다. 더운 날씨에도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쨍한 햇볕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놀 때, 도보 40분의 긴 하굣길을 거쳐 집에 돌아왔을 때, 더위에 지쳐 거실 마루에 쪼르르 누워 있을 때. 엄마는 우리에게 양철 그릇을 내밀었다.


그릇 안에선 차가운 갈색 물이 찰랑였다. 그럼 우리는 놀다 말고, 가방을 멘 채 신발주머니만 대충 내려두고 두 손으로 양철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릇만 만져도 온몸의 열이 내려갔다. 한 여름의 열기에 빨갛게 익은 손바닥도 금세 차갑게 식었다.


우리는 마당 파라솔  평상에, 거실 마루에 앉아 미숫가루 물을 마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맛을 느끼려면 손을 쉬지 않아야 했다. 미숫가루 물을  하고, 남은 가루와 물이  섞이도록 양철 그릇을 동그랗게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얼음이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여름의 소리였다.

 


그 맛이 생각나면 지금도 미숫가루 물을 타 먹는다. 그때 쓰던 양철 그릇에 미숫가루 가득, 물 많이, 꿀 조금, 얼음 두 알을 넣고 은수저로 휘휘 젓는다.


그런데 그 맛은 쉬이 나지 않는다. 역시 햇볕 아래에서 한껏 땀 흘린 후에 마셔야 하는건가?


어쨌든 달고 시원하다. 역시 여름의 맛이다.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작은 두 손바닥으로 그릇을 가득 잡아 호로록 마시곤 했는데, 지금은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려 꿀꺽꿀꺽 털어 넣는다. 이따금씩 그릇을 대충 휘휘 돌리기도 하면서. 손이 커진 탓은 아니다. 몸이 많이 자라지 않은 대신 어른의 습관이 자랐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66일 차 _ 미숫가루와 양철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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