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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Apr 10. 2021

100년 된 독채에서 새 아파트로 이사오던 날

시골에서 상경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내겐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바로 생각나는 큰 이벤트는 바로 ‘이사’다. 이사를 많이 해서는 아니고, 지금까지 딱 한번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가는 친구들을 보곤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짐을 싸는 친구들이 마치 여행을 떠나는 듯 보였다. 자가, 전세 등 부동산 개념일랑 일절 모르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나도 이사라는 걸 해보고 싶어 졌다. 기와집에 산다는 것, 집에 넓은 마당과 밭, 나무가 있다는 것은 호기심 많은 내게 좋은 환경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사춘기 비슷한 것을 겪으면서 남과 비교하게 된 때부터 내 집이 부끄러워졌다.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는 게 유행이던 당시, 생일을 맞은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들 집은 대부분 빌라나 아파트였다. 처음 보는 구조와 생활환경이 신기하기만 했다. 반면 아파트가 아닌 100살 넘은 낡은 기와집에 사는 나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오래된 기와집이라  안에서도 한기가 돌았고, 바람을 막기 위해 처마 아래로 슬레이트를  둘러 벽을 만들었다. 실생활을 위해 현대식으로 조금씩 고쳐가면서, 기와집 특유의 운치는 점점 사라지고 못생긴 집이 되어갔다. 게다가 마당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다는 ,  안에서도  방에서 거실로  , 안방에서 화장실로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한다는 , 난방을 연탄으로 한다는 , 겨울마다 수도가 쉽게 얼어 물을 끓여서 씻어야 한다는 , 집에서 쥐와 벌레가 많이 나와   구석구석에 쥐덫(종이에 끈적한 풀이 붙은 ) 놓아져 있는 . 아파트에서 편리하게 사는 친구들 눈엔, 이렇게 불편하게 사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걱정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둔 13살 겨울, 꿈에 그리던 이사를 했다. 언젠가 옆 동네에 아파트가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어른들은 이사를 계획했다. 15층짜리 아파트 9층으로 간다고 했다. 집을 보고 온 아빠는 중간층이 가장 좋은 곳이라 했다. 아파트 중에서 우리 집이, 앞에 높은 건물과 다른 동이 보이지 않아 아마 전망이 가장 좋을 거라 했다. 그렇게 해보고 싶던 이사를 나도 하게 되었는데, 마음이 설레거나 들뜨진 않았다. 이사 날에 가까워질수록 지금 집에 대한 아쉬움만 켜져 갔다.


이사 D-14.

집 곳곳을 다니며, 아빠가 몇 개월 전 사준 내 생애 첫 핸드폰으로 집의 모습을 찍어댔다. 대문부터 마당을 지나 집까지 들어가는 길을 동영상으로 찍고, 빨래 너는 곳, 뒷마당, 평소엔 무서워서 잘 들어가지 않던 서재 뒤편에 가 사진을 찍어뒀다.


이사 D-1.

이삿짐으로 북적한 집 안을 돌아다니며 내 작은 배낭에 무엇을 담을지 한참 고민했다. 이삿짐 박스에 넣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옮겨오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배낭에 어떤 것을 담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엄마가 이천 여행에서 사준 돼지 모양의 조그만 도자기, 잘 때 안고자는 곰돌이 인형, 아끼는 스티커 같은 것들로 가방을 꽉 채웠을 거다.


이사 D-day.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다. 할머니와 언니와 내가 선발대였다. 각자 배낭 하나, 짐가방 하나씩을 들고 새 집으로 출발했다. 엄마와 아빠는 기와집에 남아 이삿짐을 확인하고, 어린 동생을 챙겼다. 미련 없이 집 대문을 박차고 나서는 할머니, 언니와 달리, 내 발은 역시 집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도 살짝 났다. 내 추억이 남겨진 이곳을 두고 돌아설 수가 없었다. 뒷걸음질이라도 하며 멀어져 가는 집과 동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왜인지 할머니는 마음이 급했다. 혼이 나지 않기 위해 할머니의 빠른 걸음에 맞춰 발을 옮겼다. 그렇게 30분을 걸었다. 깜깜한 동네길을 지나, 크고 긴 도로를 한참 지나 걸어가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내 눈은 초롱초롱해졌고, 아쉬웠던 마음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아파트가 지어진 당시, 아파트 주변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파트 앞엔 긴 도로가 하나 나 있고, 도로와 아파트 사이에 작은 주택가뿐이었다. 마치 섬 같았다. 어둡고 낮은 동네에 우뚝 서서 반짝이는 아파트를 보곤 ‘우와’ 하고 입이 벌어졌다.


우리 동 현관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카드키를 꺼내었다. 벽에 달린 기계에 카드를 대자 “삑”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또 한 번 “삑” 하고 이번엔 집 문을 열었다.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집 안이 반짝였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불빛, 가로등 불빛이 거실 창을 통해 들어와 집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빨갛고 노란 그 불빛이 마치 밤하늘의 별 같았다. “우와~” 하고 소리 내어 말했다.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었다. 태생이 시골쥐인 나도 한순간에 서울쥐가 된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현관 바로 맞은편 방에 짐을 놓으라고 했다. 거기가 우리 방이라고 했다. 역시 난 새집에서도 언니와 한 방을 쓰게 됐다.




새 아파트로 이사를 오고, 반년 정도는 좋았다. 그런데 금방 옛 집이 그리워졌다. 윗집과 윗 윗집 사람들이 층간소음 때문에 주기적으로 싸웠다. 이 건물 안엔 옛 동네 사람들 수보다 3~4배는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앞집과 아랫집을 제외하곤 우리 동에 누가 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얼굴 모르는 다른 집 사람들과도 연결이 되어있다는 게 참 이상했다. 화장실에서 윗집인지 아랫집인지 옆 옆집인지, 어딘가에서 시작된 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기와집에 살 땐, 집 안에선 비행기 소리나 과일 트럭 방송 소리, 가끔 찹쌀떡 아저씨 목소리만 들릴 뿐 다른 집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당에 나가 수박을 먹거나 동네 골목에 나가 킥보드를 타면서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과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내가 누군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날 알고 있었다. 그들 기억에 나의 성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젠 우리가 햇살을 받으며 누워 쉴 마당도, 뛰어 놀 골목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언니와 나는 그런 옛 집이 그리워, 종종 기와집을 찾아갔다. 집 대문과 담벼락 너머로 마당과 집을 구경했다.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기와집이 허물어지고, 집 터에 5층짜리 오피스텔이 들어서면서 우리의 흔적이 담긴 집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는 일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 이사 온 당시 아파트 앞엔 높은 건물 하나 없어, 창 밖으로 보이는 건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산 자락뿐이었지만, 이제는 그 사이에 대형 쇼핑몰, 전시장, 오피스텔, 주차장 건물 등이 세워지면서 산도 잘 보이지 않는다.


점점 높은 건물로 채워져 가는 창 풍경을 바라볼 때면 종종 시골쥐로 살던 때가 무척 그리워진다. 쥐들도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세상인 도시보다 흙과 풀 세상인 시골에서 더 먹을 것, 맘 편히 몸 누일 곳이 훨씬 많지 않을까? 아파트의 편리함을 이미 맛본 내가 다시 기와집으로 돌아가기엔 어렵겠지만, 언젠가 아파트를 벗어나 마당 있는 낮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만약 아이를 갖는다면, 내가 어린 시절 경험한 것을 그 아이에게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마당에 코스모스 꽃밭과 큰 철쭉나무가 있었다. 매년 5월, 철쭉이 피어날때마다 만개한 철쭉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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