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엔 어린 내가 있다
정말이지 산책을 너무도 사랑하는 내겐 나만의 산책 코스가 여럿 있다. 그날의 감정, 날씨에 따라 코스를 정한다. 날은 화창하고 따뜻한데, 내 마음엔 부슬비가 내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곳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의 내가 살아있는 골목길.
우리 가족은 16년 전, 걸어서 10분 거리인 지금 집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이사를 했다. 아파트에 처음 입주한 당시엔 거실 창 너머로 전에 살던 동네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옛 동네와 지금 집 사이에 대형 쇼핑몰과 전시장, 대략 300세대의 대형 오피스텔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젠 집에서 옛 동네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던 기와집도 금방 허물어지고 그 자리엔 오층짜리 오피스텔이 세워졌다.
옛 집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가끔 섭섭함에 눈물이 나게 하지만,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오래된 동네가 하나 둘 허물어지고 아파트 숲이 되어가는 세상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 집의 흔적만 빼곤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것. 내가 다닌 초등학교, 등굣길, 내가 뛰어놀던 골목, 스크류바나 아몬드 초콜릿을 사 먹던 집 앞 슈퍼와 가끔 엄마 심부름을 위해 들렀던 오래된 약국까지. 어린 시절의 내가 매일 같이 거닐던 골목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그 약국은 한약방처럼 한쪽 벽면 전체가 나무 서랍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약을 사러 가면 약사 할아버지가 나무 서랍을 열어 약을 꺼내 주었다. 그런 약국의 분위기는 당시에도 주인장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
아파트 정문에서 2분 정도를 걸어 고가도로 위의 육교를 지나면 주택가가 보인다. 그곳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나온다. 정문 높이, 구령대의 높이도, 정문 옆 쪽문의 폭도, 당시 시 내의 초등학교 중에서 가장 넓었다던 운동장도 소박하게만 느껴진다. 내 몸의 성장을 느끼며, 초등학교 울타리를 왼쪽에 끼고 16년 전의 하굣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당시 학교에서 우리 집까진 어린 내 걸음으로 40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그 긴 거리 중간에 지금은 큰 도로가 하나 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하굣길의 80%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부터 집 터까지 여유롭게 걸어도 20분이 채 안 걸린다. 지금의 나보다 걸음이 두 배는 느렸을 그 꼬마는 매일 이 먼 거리를 두 번씩 걸으며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학교가 왜 이리 머냐며 발을 땅에 툭툭 차고 입술을 삐죽거리기도, 지나치는 동네의 풍경을 구경하며 휘파람을 불기도 했겠지? 그 꼬마의 걸음에 맞춰 이 길을 함께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굣길 동네는 살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하나 둘 떠난 후 새로운 누군가로 채워지지 않게 되면서 한 집 걸러 한 집이 주인을 잃었다. 재개발 예정에도 없어 2021년인 지금에도 90년대 주택가의 모습을 한, 인적이 드문 이 곳은 누가 보기에도 오래전에 죽었다. 이렇게 생기를 잃은 이 골목에서 어린 시절의 내 마음만은 활짝 피어난다. '이 집엔 내 친구가 살아. 친구 이름은 다섯 글자라서 이름을 부를 때 조금 오래 걸려. 그렇지만 그 말소리가 너무 예뻐서 좋아. 여긴 우리 영어 선생님 집이야. 키키(슈나우저, 당시 5세)는 지금 자고 있으려나? 이 집을 지나면 순대 공장이 나와. 항상 순대 찌는 냄새가 폴폴 나지. 그런데 난 순대를 안 좋아해. 그래서 여기서부터 숨을 참고 뛰어가야 해. 뛰어서 이 길을 지나고 나면 심장이 쿵쿵거려서 아프지만 뿌듯하고 재밌어. 세탁소 아저씨는 오늘도 바쁘네. 여기를 지날 땐 재밌는 냄새가 나. 따뜻하고 깨끗한 수증기 냄새···.'
내 마음에 비가 내릴 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골목을 찾는 것은 어쩌면, 스쳐 지나는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며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던 어린 나, 슬픈 일도 한 밤 자고 일어나면 금방 털어내던 씩씩한 내가 그리워서 인 걸까? 어린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곳, 이 긴 골목길이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남아있어 준다면 좋겠다. 내가 언제고 어린 나의 마음이 필요할 때 이곳에 와서 주워갈 수 있도록.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22일 차 _ 내가 살아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