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영 Mar 22. 2021

내가 살아있는 곳

그 골목엔 어린 내가 있다

정말이지 산책을 너무도 사랑하는 내겐 나만의 산책 코스가 여럿 있다. 그날의 감정, 날씨에 따라 코스를 정한다. 날은 화창하고 따뜻한데, 내 마음엔 부슬비가 내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곳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의 내가 살아있는 골목길.


우리 가족은 16년 전, 걸어서 10분 거리인 지금 집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이사를 했다. 아파트에 처음 입주한 당시엔 거실 창 너머로 전에 살던 동네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옛 동네와 지금 집 사이에 대형 쇼핑몰과 전시장, 대략 300세대의 대형 오피스텔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젠 집에서 옛 동네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던 기와집도 금방 허물어지고 그 자리엔 오층짜리 오피스텔이 세워졌다.


옛 집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가끔 섭섭함에 눈물이 나게 하지만,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오래된 동네가 하나 둘 허물어지고 아파트 숲이 되어가는 세상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 집의 흔적만 빼곤 모든 것이 살아있다는 것. 내가 다닌 초등학교, 등굣길, 내가 뛰어놀던 골목, 스크류바나 아몬드 초콜릿을 사 먹던 집 앞 슈퍼와 가끔 엄마 심부름을 위해 들렀던 오래된 약국까지. 어린 시절의 내가 매일 같이 거닐던 골목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그 약국은 한약방처럼 한쪽 벽면 전체가 나무 서랍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약을 사러 가면 약사 할아버지가 나무 서랍을 열어 약을 꺼내 주었다. 그런 약국의 분위기는 당시에도 주인장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


아파트 정문에서 2분 정도를 걸어 고가도로 위의 육교를 지나면 주택가가 보인다. 그곳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나온다. 정문 높이, 구령대의 높이도, 정문 옆 쪽문의 폭도, 당시 시 내의 초등학교 중에서 가장 넓었다던 운동장도 소박하게만 느껴진다. 내 몸의 성장을 느끼며, 초등학교 울타리를 왼쪽에 끼고 16년 전의 하굣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당시 학교에서 우리 집까진 어린  걸음으로 40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거리 중간에 지금은  도로가 하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하굣길의 80%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부터  터까지 여유롭게 걸어도 20분이   걸린다. 지금의 나보다 걸음이  배는 느렸을  꼬마는 매일   거리를  번씩 걸으며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학교가  이리 머냐며 발을 땅에 툭툭 차고 입술을 삐죽거리기도, 지나치는 동네의 풍경을 구경하며 휘파람을 불기도 했겠지?  꼬마의 걸음에 맞춰  길을 함께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굣길 동네는 살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하나 둘 떠난 후 새로운 누군가로 채워지지 않게 되면서 한 집 걸러 한 집이 주인을 잃었다. 재개발 예정에도 없어 2021년인 지금에도 90년대 주택가의 모습을 한, 인적이 드문 이 곳은 누가 보기에도 오래전에 죽었다. 이렇게 생기를 잃은 이 골목에서 어린 시절의 내 마음만은 활짝 피어난다. '이 집엔 내 친구가 살아. 친구 이름은 다섯 글자라서 이름을 부를 때 조금 오래 걸려. 그렇지만 그 말소리가 너무 예뻐서 좋아. 여긴 우리 영어 선생님 집이야. 키키(슈나우저, 당시 5세)는 지금 자고 있으려나? 이 집을 지나면 순대 공장이 나와. 항상 순대 찌는 냄새가 폴폴 나지. 그런데 난 순대를 안 좋아해. 그래서 여기서부터 숨을 참고 뛰어가야 해. 뛰어서 이 길을 지나고 나면 심장이 쿵쿵거려서 아프지만 뿌듯하고 재밌어. 세탁소 아저씨는 오늘도 바쁘네. 여기를 지날 땐 재밌는 냄새가 나. 따뜻하고 깨끗한 수증기 냄새···.'


내 마음에 비가 내릴 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골목을 찾는 것은 어쩌면, 스쳐 지나는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며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던 어린 나, 슬픈 일도 한 밤 자고 일어나면 금방 털어내던 씩씩한 내가 그리워서 인 걸까? 어린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곳, 이 긴 골목길이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남아있어 준다면 좋겠다. 내가 언제고 어린 나의 마음이 필요할 때 이곳에 와서 주워갈 수 있도록.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22일 차 _ 내가 살아있는 곳


매거진의 이전글 삼 남매와 제철 과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