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측은지심이 필요해
아 또 다섯 명이야...
출근길, 친구에게 카톡을 보낸다. 앞에 한 명, 양 팔에 각각 한 명, 등 뒤로 두 명, 총 다섯 사람의 신체 일부가 내 몸에 닿아 있다. 지하철 급제동에 발이 밟혔는데 아무도 사과를 안 한다. 또 한 번 지하철이 휘청거리자 같은 부위가 또 밟힌다. 공간이 좁아 피할 구석도 없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던데, 혹시 세상이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가. 세 번째 밟힌 순간 결국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입을 떼고 만다. “하, 제발 그만 좀 밟으세요!”
매일 아침 지하철 두 번에 버스 한 번을 탄다. 살면서 다녀봤던 등교길과 출근길을 통틀어서 이렇게까지 최장거리에 최다환승 루트는 처음이다. 집에서 회사까지 상봉역과 국회의사당역을 오가는데 걷는 구간까지 포함하면 얼추 25km 정도, 도어 투 도어로 왕복 세 시간이다. 거리가 먼 것 자체도 쉽지 않지만 환승이 잦은 건 더 힘들다. 앉은 채로 한번에 쭉 갈 수 있으면 눈이라도 붙일 텐데 환승역 놓칠까봐 잠도 못 잔다. 지루함을 달래보고자 여러 시도를 해보았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1. 책읽기
장점: 다독 가능(6개월 만에 20권 도달)
단점: 가볍고 쉬운 책만 본다. 깊이있는 독서는 불가능하다.
2. 넷플릭스 보기
장점: 콘텐츠 잘 고르면 시간 잘 간다.
단점: 한 편 고르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미드나 영드는 느닷없이 야한 장면이 나올 수 있다. 상시 후방주의가 필요하다.
3. 유투브 보기
장점: 이것도 콘텐츠 잘 고르면 시간 잘 간다.
단점: 1시간 반을 풀로 채워주는 영상은 잘 없다. 웃음을 찾는 유목민이 된다. 남는 건 약간의 즐거움과 현타.
단,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으려면 앉아서 가는 중이거나, 최소한 누구와도 살을 맞대지 않고 편안히 서서 가는 중이어야 한다. 몸에 3명 이상 닿아 있는 경우엔 팔을 최대한 몸 가까이 붙여두는 게 여러모로 안전한데, 이 경우 핸드폰과 눈 사이는 15cm쯤 된다. 이렇게 보느니 안 보는 게 낫다. 시청환경의 질은 지하철 밀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여건이 좋지 않다면 아래와 같은 시도들을 한다.
4. 아무 것도 안 하기
장점: 체력과 주의력을 비축할 수 있다.
단점: 회사 또는 집에 도착하면 굉장히 허무하다. 시간이 아깝다.
5. 유투브 듣기(는 프리미엄 결제 후에 가능하게 됐다.)
장점: 핸드폰을 안 들고 있어도 된다.
단점: 콘텐츠 선택의 폭이 좁다. 라디오 같은 콘텐츠를 주로 듣는다. 예를 들어 삼프로TV가 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출근(또는 퇴근)하면 그 하루가 참 아깝다. 우스갯소리로 "길에서 늙는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다. 유한한 내 젊음, 내 인생을 이렇게 길바닥에 허비해도 되는 걸까. 6시 반 정시에 퇴근하고 부랴부랴 달려가도 집에 오면 8시. 저녁 먹으면 9시, 씻고 나면 훌쩍 10시가 지나있다. 기껏 한 거라고는 출근과 퇴근 뿐인데. 삶이 한껏 납작해진 느낌이 든다.
시간이 금이니, 차라리 돈을 써볼까 생각했다. 독립 계획을 세우고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월세는 밑 빠진 독에 물 붇는 격이라 생각해서 회사 주변 전세 매물을 찾았다. 나름 직장인인데, 방 하나는 분리되어 있는 게 좋겠지? 응, 2억 3천. 아니다, 거리만 가까우면 방 크기가 뭔 대수겠어. 당산 근처 원룸에 살면 자전거 타고 출퇴근할 수 있겠다! 응, 1억 8천. 대학가 주변으로 가면 좀 저렴하지 않을까. 응, 그래도 5평 원룸 1억 3천.
꾸역꾸역 눈을 낮춰 전세 대출 상담을 한번 받아봤다. 가용자금이 넉넉하지 않아 추가 신용 대출이 불가피했다. 수지타산을 따져봤다. 본가가 서울인데 서울에 또 거처를 구한다. 그런데 빚까지 져서 얻을 수 있는 집은 고작 5평대 원룸이다? 게다가 첫 독립이니 모든 살림살이를 새로 사야할 터였다. 이것저것 다 따지고 나니 독립이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로 느껴지지 않았다. 기껏 독립해서 나왔는데 인사발령이 다른 지역으로 나면 어떡한담? 난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일단은 집에서 더 다녀보자고 정신승리를 했다. 그럼에도 잠시 접어둔 독립의 꿈은 자주 다시 꿈틀거리곤 한다.(가령 야근한 날이라든가….)
얼마 전, 성남시에 업무 회의를 하러 갔던 때다. 몇차례 만남으로 조금 가까워진 협회 연구원님과 이런저런 근황토크를 했다. 집에서 회사 가는 거리나 성남시 오는 거리나 얼추 비슷하다고 했더니 어디 사느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하고 상봉동에 산다고 대답했더니, 연구원님이 놀란 눈을 했다. 본인은 별내동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별내에서 성남이라니, 동쪽 경기도민이 서울을 세로지나 남쪽 경기도로 출근을 한다니. 자아아앙거리 통근러 앞에서 퍽 숙연해졌다. 굼벵이 앞에서 주름 잡을 뻔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생각보다 장거리 통근러가 꽤 있다. 인천 영종도, 인천 청라, 경기도 일산, 경기도 과천…. 사는 지역도 각양각색이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생각하면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신경질적인 사람들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당신 삶만 고된 게 아닌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나한테 이러나 싶어 덩달아 예민해지기 부지기수다.
그러니 제발, 모두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졌으면 한다. 만원 지하철에서 선 채로 꾸벅꾸벅 조는 이 사람도, 이쑤시개 같은 킬힐 신고 헐레벌떡 뛰어와 겨우 탑승한 저 사람도 다 나만큼 짜증나고 지쳤을 테다. 먹고사는 게 도대체 뭐길래. 어차피 사정은 피차일반이니, 서로 조금 가여워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발 밟으면 사과하고, 밟혔어도 사과하면 받아주는 평화로운 아침 풍경을 그려본다. 살 맞대고 꾸역꾸역 출근하는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 화이팅이다.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스트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