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2번의 수업을 듣고 풀어내는 소감
요가원에 다닌 지 3주 정도 지났다. 주로 듣는 수업은 저녁의 ‘아쉬탕가 마이솔’이지만, 다른 요가 스타일도 궁금해 오전 아헹가 수업을 들었다. 아헹가 요가는 로프, 블록, 의자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서 정확한 아사나(자세)를 잡도록 하는 수업이다. 각자만의 수련을 하는 아쉬탕가 마이솔과는 다르게 선생님이 동작을 지도하고 우리는 따라 한다. 정확한 위치와 자세를 잡아주는 기분이 좋다.
아쉬탕가 마이솔은 끝없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고, 아헹가는 정확하게 멈춰있게 한다. 두 가지를 함께 할 때 더 좋은 수련이 되는구나 하는 감각이 든다. 아쉬탕가는 동작을 연결하면서 집중하기 때문에 수련의 느낌이 강하지만, 호흡이나 순서 등을 고려하느라 정확한 자세를 취하지는 못한다. 아헹가는 손의 위치, 허리의 펴짐, 강도 등을 꼼꼼하게 살펴 좋지만, 연속된 무언가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쉬탕가를 하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얼렁뚱땅 지나간 동작이 꼭 아헹가 수업 시간에 나온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자극이 오는지, 어떤 부위를 위한 운동인지 정확하게 깨닫고 아쉬탕가에 다시 적용할 수 있다. 서로의 수업을 듣고 나면 안 되는 자세가 되기 시작한다. 그 기분이 참 좋다.
집에서 요가원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린다. 백수의 패기로 지도자 과정을 꿈꾸며 요가원을 처음 갔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게 좀 귀찮다. (그래도 지하철 환승을 두 번이나 하고 있는데! 귀찮을 만 하지!) 무엇보다 고민이 되는 건 예전만큼 요가를 했을 때 엄청나게 기쁘지 않다는 점이다. 뿌듯함이나 성취감, 개운함이 들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지쳐서 요가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어떤 것에도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었다. 코로나 이전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요가만 있다면 삶이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요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왜 이럴까? 지도자 과정 수업을 들을 만큼 요가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이런 생각들이 자주 든다. 특히 요가 동작을 할 때 잡생각으로 딱이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요가를 끝내면 버티기를 한 기분이다. ‘해내긴 했군.’ 정도의 안도감이 든다. 마치 미뤄둔 숙제를 겨우 끝낸 듯한 애매한 뿌듯함. 이제 요가는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게 아닌 걸까. 좋아하는 걸 잃은 듯한 약간의 충격이 있었다.
꼼꼼히 생각해보면 일단은 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보통 어떤 수업을 듣던 우등생 편에 속했었는데, 최근의 나는 아주 얼렁뚱땅 실수 연발이다. 갈길이 아주 멀다. 또 다른 이유는 지금 요가가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 요가를 하면 이 정도는 할 만하다. 다 떨쳐버리고 요가로 도망올 수 있었다. 백수의 초조함도 한몫하는 것 같다.
그래도 꾸준히 수업을 듣다 보면 상상할 수 없는 동작이 되는 순간이 오고, 다시 황홀한 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사실 황홀까지 가지 않아도, 고단하고 끝냈다는 안도감만 있어도 괜찮다. 요가는 과정이니까. 끝없이 같은 자세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것을 깨닫는 수련이니까. 좋은 자세로 멈춰있는 법만 배워도 충분하다. 지금 내가 겪는 공백기, 헤매기도 잘 멈춰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아헹가를 수련하다 보면 삶에서도 좋은 자세로 멈춰있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물 흐르듯 움직이는 법도 알게 된다.
참, 이번 주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우르드바 다누라사나(Urdhva Dhanurasana), 위를 향한 활자세를 성공했을 때였다. 시야가 전복되고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이 동작이 좋다. 팔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여전히 어깨는 잘 내려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