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영화 같은 순간을 남기려는 마음이, 수고로움을 이긴다
36도, 체감 온도 43도에 육박하는 온도에 스콜을 예보하는 듯한 습도가 더해져 참을 수 없는 날씨였다. 그러나 우리는 촬영을 진행해야만 한다. 내일은 없다. 스탭 콜타임 10시, 배우 콜타임 12시.
스태프들은 배우 콜타임이 되기도 전에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우리는 마을 회관 대여와 에어컨 사용을 기대했지만, 사용 허락을 받은 방에는 정작 에어컨이 없다는 걸 당일에 알아 버렸다. 유일한 휴식처인 정자에서 꽁꽁 얼린 생수만이 우리의 생명수였다. 나도 평소라면 착용하지 않을 꽃무늬 자외선 차단 마스크와 챙 넓은 모자로 무장했다. 동료들은 처음에 내가 등장했을 때, '진짜 조감독님 그 자체시네요'라며 웃었지만 오분 뒤엔 나를 부러워했다. 미술팀은 법당 씬을 위해 세트장을 구성하러, 감독과 촬영팀은 현장에서 정확한 샷을 미리 구상하러, 제작팀은 챙겨 온 비상용품과 간식들을 미리 배치하고 있었다.
나는 주로 스텝 콜타임에 맞춰 동행하게 된 배우님을 챙기고 우리 스케줄표대로 일정이 흘러가도록 시간을 관리했다. 간단하게 김밥을 먹고, 나머지 배우님들과 우리 워크숍의 총책임자와 대구미디어센터 관계자분들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촬영을 시작했다. 낮 2시. 가장 뜨거운 열기 속에서 배우들은 우산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연기를 시작했다. 이때 연기는 걸어오기, 계단 오르기, 대사 한 마디, 문 여닫기 등이다. 촬영 현장을 모르는 누군가는 겨우 이런 동작을 찍는데 한 시간씩이나 소요되느냐고 놀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실제 앞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찍는 리얼리즘의 영역이지만 정해진 각본과 스토리보드에 맞게 화면이 구성되어야 하는 철저하게 허구의 세계다. 정확한 화면 구도와 장면이 연출되기 위해서는 연기자들의 시간이 화면상에서 진짜처럼 보여야 한다. 배우의 실제로 빨리 걷는 걸음걸이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만약에, 시나리오에서 '00이 걸어온다'는 문장을 카메라에서 니(knee) 컷으로 카메라 이동 없이 멀리서 걸어오는 장면으로 담는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의미 없는 장면을 삽입하여 의미를 생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컷에 의미가 담겨 있다. 위의 문장에는 캐릭터의 등장일 수도, 어떤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일 수도, 혹은 캐릭터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 장면은 전체 영화에서 의도하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 의도에 맞게 컷이 구성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의도에 맞게 배우의 연기가 결정되는 것이다. 만약, 걸어오는 장면이 캐릭터의 등장씬이라면, 캐릭터의 성격이 드러나야 하고(여기서 성격이란 어떤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속 등장인물의 성격 그 자체를 말한다) 무엇보다도 카메라에 비친 모습이 그 장면의 의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감독이 설정한 장면이 그저 평범한 아저씨의 등장이었다면, '평범'이라는 단어가 함축한 이미지 즉, 대게 사람들이 걷는 걸음 속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본인의 빠른 걸음걸이 습관 대신 영화 장면의 속도를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NG가 난다.
조감독이 촬영 전 카메라-(롤), 사운드-(스피드) 외친다. 그러면 슬레이터가 씬 1의 1의 1을 외치고, 감독은 레디 액션을 외치면 촬영이 시작된다. 그리고 CUT과 NG의 반복. 영화에서의 한 장면을 구성하기 위해 여러 번의 테이크가 반복되고 그렇게 실제 시간이 흘러간다. 실제로 1시간이 흘러도, 영화에서 이 장면은 3분 남짓된 느 장면이 될 수도 있다. 무수히 반복되는 컷들과 흘러간 시간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배우의 메이크업 상태와 소품의 위치를 점검하지만 자연의 제약을 피할 수는 없다. 점점 변하는 빛의 색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해 질 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40분 정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기 위해 최대한 실수 없이 집중적으로 촬영했다.
그렇게 촬영은 한 시간 정도의 저녁시간을 제외하고 밤 12시까지 정신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새벽 두 시경, 우리 영화의 하이라이트 씬이자 오늘 촬영의 마지막 장면을 앞두고 있었다. 영화 상의 시간 순서와 우리 실제 시간의 흐름이 비슷했기 때문에 시나리오 캐릭터의 상태와 배우님의 지친 체력의 온도가 적당히 알맞았다.
배우님이 마지막 체력과 포텐셜을 터트리며 첫째 날 촬영을 종료했다.
우리 스텝들은 관계자분들의 배려 덕에 넓은 숙소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약 15시간 만의 에어컨 바람을 쐬며 라면을 먹고 잠에 들었다. 3시간 정도 잠을 청했을까. 다음날, 너도 나도 부은 얼굴에도 배우님들은 하나도 붓지 않은 얼굴로 촬영장에 나와있었다. 이튿날에도 어제 잠깐 쐰 에어컨의 한기가 그리워지는 날씨가 이어졌다. 첫째 날은 바람이 불긴 했다면 이튿날에는 바람마저 자취를 감춘 그야말로 찜통의 날씨였다. 이튿날의 촬영도 첫째 날과 대게 비슷하게 이어졌고, 다행히 촬영해야 하는 씬이 적었다. 하루 만에 체력을 많이 소진한 스텝들과 배우들은 말이 적었고, 흘리는 땀의 무게는 더 무거웠다. 여름이면 대게 바닷가나 계곡에 가서 더위를 식힐 텐데, 우리는 여름의 태양을 온전히 흡수하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벌써 촬영날을 회상하고 있다.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햇빛에 그을려 거무튀튀한 내 손등을 보며 그날 흘린 땀방울은 미화한다. 내가 흘린 땀방울은 여름날의 땀방울이었다고. 젊은 날 여름날이라면 흘려야 마땅한 땀이라고. 그리고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추억은 그리움이 되어, 이내 마음속 은근한 간지러움으로 자리할 것을.
긁어대다 견디지 못하면, 또다시 현장에 가있을 것을.
언제나 영화 같은 순간을 남기려는 마음이, 그 수고로움을 기어이 이겨낼 것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