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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h Gray May 27. 2018

너 아직도 뾰족따끔하니?

나이 먹어 변한 게 있긴 있네...

요 며칠간 생각하긴 했었다.

15년 전 이맘때 쯤 썼던 그 시를 찾아내야겠다고.

혼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보니 어느새 그 시에까지 내 기억이 미치게 되었다.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뭘 함부로, 섣불리, 버리지 못하는 나는

스무살 이후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종이뭉치들을 커다란 박스에 일단 집어넣곤 했다.

그러다 어쩌다 한번씩 큰 맘 먹고 그 박스를 열어 종이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본 후, 꼼꼼히 확인하여 신중히 결정했다. 버릴지, 말지.


물론! 그 '어쩌다 한번씩'은 매우 드물게 있는 일이다. 파기 순서도 뒤죽박죽이라 '어쩌다보니' 역순으로 파기되어 20대 초,중반의 종이뭉치들만 두어박스, 현재까지 내 방에서 동거 중이다.


'올 2월까지 꼭 다 치운다.'

'1/4분기 안에 싹 다 정리한다.'

'상반기 안에 기필코 버린다.'


2018년도의 큰 계획 중 하나였는데 어찌 점점 늘어져만 간다. 그래도 조금씩 끝내가고는 있지만, 아무튼 처음 계획보다 석달 이상 늘어졌다. ^^;;;


오늘은 우연한 계기로, 드디어 그 상자를 열어제꼈다. 생각보다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버릴지 말지만 고민하면 되겠더라^^ ㅠ), 생각보다 쉽게 시를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오글거렸다.

지금은 감수성 충만한 새벽 2시.

그러나 오글거렸다.


내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모든 고뇌와 번민을 담아 쓴 역작이거늘, 어찌 이리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말인가! 하며 그 이유를 생각 해 보았다.


지금의 나는 이 시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나는 변했다.


이게 이유였다.




수능 끝나고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난 어린 시절 친구의 거듭된 고백을 거절하며 나는 난감하게 20대를 시작했다.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하는가?


아주 많은 이유=변명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이것은 변명이 아니었다. 아니, 될 수 없었다. 정확한 이유였다.)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였다.

사랑을 어떻게 주고 받는지도 몰랐고(정신적+육체적 사랑 모두 다. 아니 이 때는 육체적 사랑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사랑은 '아주 당연히' '정신적 사랑이 전부'라 생각했다.), 잘 해낼 자신도 없었다. 요즘 말로 '자존감이 낮았다'.


그래서 정말 너무나 많이 망설였다. 물론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많았지만(뭐, 이왕이면 장거리 연애가 아니라 가까이서 나를 잘 챙겨줄 수 있는 연상의 오빠를 원했다거나, 하는 것들) 궁극의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 친구와는 끝내 아무 사이도 되지 않았고, 사귀었다 헤어지면 친구 관계조차 깨질 거란 나의 우려가 무색하게, 사귀지도 않았는데 친구 관계도 어색해졌다.

물론 그후로 수년간, 수많은 오해와 엇갈림, 감정 노동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냥 '지인'정도의 사이(내 기준이다. 그 친구는 서운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친구도 아니고 그냥 지인, 이라고)가 되었다.


그리고 이 친구(여기서 내가 쓰는 '친구'란 단어의 뜻은 friend가 아니라 he 정도 되겠다.)는 얼마전 나에게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처음 듣고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관계는 오래 두고 볼 일, 이라 생각했었지만 어느새 이렇게까지 시간이 흘러버린 건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내가 결혼한다 했을 때 얘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내 결혼식에 안 왔으니 나도 안가도 되겠지. 예의상 전한 소식이겠지?'

'내가 파혼했다 말 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러다 이 시를 보니 참, 여러 생각들이 물밀듯 밀려온다.


그래, 그 애 때문에 이렇게 이 시를 썼고.

내 예상대로 사랑을 할 줄 몰랐던 나는 맨땅에 헤딩하듯 처절하게 다쳐가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 정점과 마침표는 파혼이었으며.

그 때 모든 것들이 폭발하듯 터지며,

나는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조용한 마음이 되어 몇 년째 혼자 '어둠 속 침묵' 같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 거라고.


한번씩 그 시행착오들을 되돌아보며 마음 아파하긴 한다.

'꼭 그런 일까지 겪어야 했나?'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왜 나타났을까?'

'그 때 나는 왜 그랬을까?'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그 때 정말 행복했던 거 맞나? 지금 생활에 기준해 봐도 행복했었나?'


하지만 언제 다시 생각해봐도,

그것들은 내 삶에 약속된 인연과 사건들이었고, 그걸 끌어당긴 건 나였으며,

내가 그것들을 끌어당긴 이유는 나는 애시당초 그렇게 태어났다=내 자신도 그러했고 나를 둘러싼 환경도 그러했다, 는 슬픈 '운명론' 이었다.

원인 없는 결과 없었고,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원인이 되어주었다.


내가 피해갈 수 있던 건 없었다.

피한다고 피해서 그 정도였다.




이 시가 오글거리다니......

이젠 내 스스로 내 안의 바늘들을 꽤 많이 뽑아냈나 보다.


당연한 일이다.

바늘을 품고 있을 때 가장 아픈 건 바로 나다.

나에게 다가와 날 어루만진 사람에겐 그저 둥글뭉툭한 바늘귀가 닿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았단 건 아니다...)

뾰족한 바늘침은 내 살을 뚫고 내 속을 파고들었다.

(바늘을 더 깊숙이 밀어넣은 사람도 있었다... 뺄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 한해두해

나는 나를 살리고, 돕고, 구원해 나가고 있다.

나는 이렇게 글을 쓰며 한 글자씩, 한 문장씩 나를 달래고, 치유해주고 있다.

이 곳에서 한숨을 쉬든, 낙담을 하든, 엉엉 울든, 짜증을 내든, 화를 내든, 고함을 지르든 나는 치유하고 있고 치료 받고 있다.


내 안의 것들을 어떻게든 빚어서 꺼내놓을 때, (설령 힘겹게 겨우 토해낸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가 점점 가벼워지고 건강해짐을 느낀다.



지금 내 마음이 텅 비었다, 느끼는 건 결코 욕심이 아닐 거다. 혼자여도 반듯하게 서있을테니 이런 나에게 뚜벅뚜벅 큰 걸음으로 다가와 정중하지만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면 좋겠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하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려주면 좋겠다.


어느

마음이 바르고 따뜻하며 단단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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