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사로 가는 길
4년제 대학교의 학부 생활을 8년 만에 끝내며 마지막 학기를 정신없이 보냈다.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필수인 '연극'에 발 하나를 담그고 차마 빼지 못한 채로 미적거리던 긴 시간이 끝난 여름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담가놓고 퉁퉁 불어버린 발을 빼는 건, 길었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쉬웠다. 그즈음엔 몇 글자 문장들과 핸드폰 속 작은 화면으로만 연명해가던 장거리 연애도 진흙탕에 빠져 질퍽거리고 있었다.
단호하게 발을 뺄 줄 모르는 나는 그렇게 7월로 내던져졌다. 그 여름에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여름에는 너무 많은 소음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것들의 틈새가 끈적였고, 아스팔트는 절절 끓었다.
가장 간절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것만 있는 공간에 이방인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몇 해 전 머물렀던 심원사 템플스테이는 굳이 떠올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바로 떠오르는 방안이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위치한 작은 절에서 머물렀던 경험은 구름 속에서 지내는 신선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으니까.
그렇게 가야산에 위치한 심원사로 2박 3일을 예약했다. 두 번째 방문이다. 좋은 건 반복할수록 좋다.
내가 사는 부천에서 성주의 심원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는 경로는 길고 또 복잡하다. 4번이나 교통편을 바꾸며 갈아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대략 7-8시간이 걸린다.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
4년제를 8년 동안 다녔던 과정은 길고 또 복잡했다.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졸업하고 취직하고 퇴사하고 석사과정을 하려고 해도 가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여기저기 경유하는 과정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곳저곳 들러보고, 새로운 풍경도 구경하고, 버스에서는 노래도 듣고 잠도 자다가, 또 내려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도 하고. 그렇게 외딴곳에 있는 목적지를 정하고 쉽게 가지 못하는 루트를 택한 건, 다른 사람의 권유나 강요도 아닌 나 혼자였다.
1) 부천 -> 서울 남부터미널
2) 남부터미널 -> 고령 터미널
3) 고령 터미널 -> 가야
4) 가야 -> 심원사
우선 부천에서 서울 남부터미널을 가기 위한 버스를 탔다. 고령행 버스 출발시간에 늦을까봐 서둘렀다. 일상에서는 제시간보다 항상 10분씩 늦는 고질병이 있다. 그래서 일상적이지 않은 날에는 늦지 않기 위해 1시간은 여유를 두고 서두른다. 15분만 서두르면 될 것을, 15라는 숫자가 애매하다는 이상한 논리로 30분 또는 1시간을 과하게 서두르거나 늦어버린다.
덕분에 일찍 도착해 터미널에서 아침도 먹고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늦게 갔더라면 만석으로 버스를 타지 못했을 뻔했다. 터미널에서 아침을 먹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미료 맛이 강하게 나는 묵국수가 먹고 싶었다.
남부터미널의 허름한 식당에서 국수를 먹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텅 빈 가게에서 혼자 국수를 먹던 그림이 머릿속에 분명 존재했다. 벽에는 약간의 노란기가 섞인 흰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그러나 이제는 군데군데 벗겨져 시멘트가 드물게 보이는, 오래된 분식집에서.
그러나 아무래도 내가 남부터미널에 갔던 기억이, 그곳에서 국수를 먹었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여행을 갔다 오던 길이었을까? 아니면 남부터미널 근처에 다른 일로 들렀다가 먹었던 걸까? 다른 캠퍼스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올라오던 길에 먹었던 건가? 아, 그 터미널은 고속터미널이었는데?
실제 겪었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꿈에서였을지도, 아니면 다른 기억과 섞여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알 수 없다. 내 기억을 타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확인할 방법도 없다. 가짜 기억이라기엔 생생하고, 진짜 기억이라기엔 희미했다. 기억이란 이토록 어설프고 실체가 없다.
고령으로 가는 버스표를 끊고 터미널을 둘러보니, 국수를 파는 한 간이식당이 눈에 띄었다. 바 형태로 되어있는 테이블에 5-6명 정도 앉아서 먹을 수 있는 협소한 곳이었다. 그곳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묵국수를 먹었다. 다만 내가 먹고 싶었던 묵이 주가 된 묵국수가 아니라, 물국수에 묵이 추가된 정도의 음식이었다.
국숫집의 젊은 남자 사장 혹은 직원은 뜨내기손님들에게도 매우 친절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아주머니와 아저씨도 국수를 드셨다. 사장 혹은 직원은 국수사리를 공짜로 더 드리겠다며 살갑게 굴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예상치 못한 서울 인심에 감복한 듯 “복 많이 받으이소”를 되풀이하셨다. 옆에서 조용히 먹던 나도 사장 혹은 직원분이 복을 많이 받으셨으면 좋겠다고 함께 빌었다.
따로 또 함께 다정했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나와 같은 목적지인 ‘고령’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우리 모두 복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었다.
고령으로 가는 버스는 새로 도입되었다는 우등버스였다. 목받침이 날개처럼 양옆으로 둥글게 둘러져있어서 잠자기에 좋았다. 게다가 내 자리는 옆좌석이 없는 한 칸짜리 좌석이라 더더욱 편안했다. 나는 따로 또 같이 우등버스에 실려 옮겨졌다.
서울에서 출발한 우등버스는 몇 개의 경계선을 지났을 것이다. 우등버스가 실어 나르던 나는 경계선을 넘는 줄도 모르는 채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