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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팔남매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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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모래시계 Oct 21. 2023

38년생, 아버지

아버지가 도시 반 시골 반인 충청도 소도시에서 제법 넉넉하게 살다 다시 경상도 성그렛골로 도망치듯 돌아왔을 때 동네 아낙네들은 입방아를 찧기 바빴다. 아버지는 살구나무집이라 부르는 처가 아래채에 괴나리봇짐 같은 이삿짐을 풀었다. 성질 사나운 장모의 상을 치른 후 아버지는 동네 미장장이를 불러 아래채를 다시 지었다. 도시에서나 있을법한 최신식 연탄보일러를 들였다. 집을 다 짓고 고사 지내는 날, 연탄을 덮는 덮개로 물을 데우는 온수통을 보려고 동네 아낙들이 앞다투어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19살에 첫 딸을 얻었다. 두 살 터울로 일곱의 딸과 아들 하나. 팔 남매의 아버지와 엄마는 동갑내기였다. 

아버지는 배움이 짧은 것치곤 글씨를 시원시원하게 쓰는 재주가 있었다. 성그렛골에서 유일하게 가계부를 적는 아버지였다. 여러 해 묵은 업무수첩을 얻어 매상으로 들어온 돈, 빌린 돈, 빌려준 돈 등을 가지런히 적었고, 가끔 짧은 일기처럼 보이는 글을 적기도 했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살았던 가락이 있어 옷을 잘 입었다. 계절이 고스란히 오고 가는 산자락과 들판에 어울리는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아버지는 마을 아낙네들을 설레게 하는 어떤 '멋'이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는 순하디 순한 아내가 가끔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의 행실을 탓하면 억울하고 서운했다. 성그렛골은 촘촘한 그물망처럼 엮인 곳이라 소문은 제대로 꼬이고 신속했다.


목소리가 짱짱했던 장모는 하나 있는 외동딸에게 집과 동네 한가운데 있는 논, 산자락 밑에 다랑이 논을 남겼다. 아버지는 그 논에 벼를 심어 쌀을 거두어 팔고, 겨울에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논에 미나리를 심어 키웠다. 봄이면 엄마는 다른 동네 아줌마들처럼 미나리를 장에 내다 팔아 푼돈을 벌었다. 온천지가 논밭인 성그렛골에서 유일하게 밭이 없던 아버지는 너른 마당 한쪽을 텃밭 삼아 푸성귀와 김장 배추 농사를 지었다.


 지난겨울 윗집 친구네 다녀온 여섯째 딸이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윗집 할머니방 한 귀퉁이에 나무판으로 벽을 만들어 고구마를 잔뜩 쌓아놓은 커다란 고구마 방이 있어요." 

아버지는 봄이 되면 고구마를 심을 밭을 하나 만들어내리라 마음먹었다. 이듬해 봄, 아버지와 엄마는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굴처럼 붙어 앉아 돌을 골라내고 흙을 다지며 고구마 심을 밭을 뚝딱 만들었다.


 가을걷이로 젖먹이 손이라도 보태야 할 추수가 한창인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엄마, 대처로 내보내 입을 덜기에는 아직 어린아이들 다섯 명이 아버지가 앞에서 끄는 리어카를 오밀조밀 붙들고 산자락을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산비탈 밭에 도착한 그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것처럼 소란스럽고 즐거웠다. 엄마가 마련해 간 보리밥과 갓 버무린 겉절이김치, 부침개와 막걸리 덕분이었을까. 


 아버지와 엄마가 마주 보고 서서 고구마 줄기를 거머쥐고 밧줄 감듯 줄기를 감아가며 밭고랑 사이를 걸었다. 마치 바닷가에 배 한 척을 띄운 후 그물을 던져 물고기들을 끌어올리는 듯 손놀림에 힘과 흥겨움이 뚝뚝 흘렀다. 고구마 줄기를 걷어낸 후 아버지와 엄마는 괭이와 호미를 각자 들고 슥슥 땅을 뒤집었다. 아이들은 땅속에서 고구마 한 줄기를 잡고 하나씩 캐내기 시작했다. 밭고랑 사이에 아이들이 캐낸 고구마가 쌓여가자 엄마의 뺨은 발그레해지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어여뻤다.  


 식구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밭에서 고구마를 건져 올렸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꼬리를 감추자 기다렸다는 듯 찬 바람이 슬슬 산기슭을 할퀴기 시작했다. 그들은 캐낸 고구마를 한 톨도 남김없이 리어카에 실었다. 고무마들이 부딪혀 상하지 않도록 아버지는 고구마줄기까지 살뜰히 거둬 고구마 사이에 넣고 나머지는 모두 고구마 위에 푸짐하게 얹었다.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아이들이 처음 밭에 올 때처럼 양쪽에 나눠 리어카를 잡았다. 엄마는 새참 그릇들을 챙기고 뒷마무리를 하느라 밭에 남았다. 


 아버지와 아이들은 집에 가서 달디 단 고구마를 쪄 먹고 새로 지은 아래채 큰 방에 고구마방을 만들어 겨울 내도록 맛있게 먹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날개가 달린 듯 가벼웠다. 아버지와 아이들은 흥에 겨워 이곳이 내리막길이라는 것을 잊어먹고 어영차 리어카를 끌고 밀었다. 어느 순간 리어카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리어카 양 옆에서 고함을 치며 떨어져 나갔다. 이를 본 엄마가 리어카를 잡겠노라 “여보! 여보!”를 외치며 그릇들을 내팽개치고 리어카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리어카 손잡이 안에서 리어카를 끌듯 뛰고 있었다. 영리한 아버지는 리어카 손잡이를 툭툭 건드리며 리어카가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으며 전력 질주를 했다. 눈이 시리게 파랗던 하늘이 지는 저녁해에 얼굴을 붉히고, 바람은 울긋불긋 산골짜기를 따라 흐르며 사사삭거리는 잎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그림 같은 가을날 저녁에 아버지가 질주하고 있다. 산자락을 다 내려가 화도랑 냇가 다리를 지나며 리어카 속도가 줄었다. 


살았다. 아버지도 고구마도. 한바탕 질주가 막을 내리자 아버지가 뒤로 돌아섰고 남편과 아버지를 잃을 뻔한 엄마와 아이들은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엉엉 울었다. 늦가을 저녁 해는 산 위로 지고 성그렛골 집집마다 굴뚝에서 몽실몽실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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