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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팔남매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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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모래시계 Oct 21. 2023

38년생, 엄마

성그렛골 한마을에서 나고 자란 엄마와 아버지는 결혼도 하기 전 첫 딸을 낳았다. 그때 엄마 나이 19살이었다. 여차저차 살림을 차린 엄마와 아버지는 대처로 나가 부지런히 안팎으로 돈을 모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아버지가 양조장으로 출근한 후 엄마는 첫딸과 둘째는 걸리고 셋째를 둘러업고 곗돈을 수금하러 다녔다. 엄마의 손가방에 든 수첩 서너 권은 엄마의 발품으로 여러 개의 곗돈 순번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마당이 넓은 집도 샀고 드디어 아들도 하나 얻었고 막내인 딸까지 여덟 아이들도 병치레 없이 잘 자라주었다. 어린 식모로 큰 고모댁에 보낸 큰딸도 다시 데려와 같이 연초공장에 나가니 세상 부러울게 없이 안온한 날들이었다. 


 어느 해 겨울밤. 엄마는 곗돈을 수금하느라 밤늦게서야 집에 돌아왔다. 안방문을 열고 들어간 엄마는 빙그레 웃음기가 얼굴에 퍼졌다. 팔남매가 안방 아랫목에 다리를 모으고 누워 마치 부채를 펼친 듯 누워 있었다. 내가 낳은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뿌듯함과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 뒷바라지를 잘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어느 날 엄마의  곗돈 수첩에 이름이 수십 번 적힌 동네 언니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곗돈 순번이 뒤에 적힌 동네 아낙들이 시뻘게진 얼굴로 한꺼번에 들이닥쳐 지금까지 넣은 내 돈 내놓으라며 살림을 부수고 난리를 피웠다. 집을 팔아 곗돈을 다 돌려주고 엄마는 울며불며 며칠을 보낸 후 이곳에서 더 살기 싫다며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양조장 수금을 하던 아버지도 비빌 언덕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는 자기 잘못으로 정든 집을 판 것 같아 억장이 무너졌다. 이곳에서 넷째부터 내리 아이 다섯을 더 낳아 그야말로 자식부자, 딸부자였다. 외동딸인 엄마는 아이들이 그냥 좋았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여덟 아이들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은 극진했다. 살과 뼈를 갈아 아이들을 키우면서 엄마는 힘든 줄도 몰랐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엄마는 친정 엄마를 떠나보내고 그 집을 엄마의 취향대로 가꾸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아래채를 새로 짓고 남은 시멘트 벽돌로 꽃밭 담장을 야트막하게 만들었다. 벽돌 구멍 하나에 한련 씨를 심었다. 그해 봄 엄마 꽃밭의 한련은 빨강 노랑 짙은 색의 꽃이 초록 잎들과 어우러져 불을 켠 듯 화사해 모내기하려고 논으로 나서던 아낙네들의 발걸음을 사로잡아 아침부터 말잔치를 벌였다.


 엄마는 또 붉은색 철 대문 위로 근사한 아치를 올려달라 애걸복걸 아버지를 못살게 굴었다. 두 해가 지나자 양쪽 대문 기둥에 심은 넝쿨장미가 손을 내민 뒤 맨살의 아치 위를 타고 넘어 맞잡았다. 대문 위에 장미꽃 왕관을 씌운 듯한 엄마의 집은 다시 한번 잔치를 하듯 떠들썩했다.  


 엄마는 아버지를 마흔다섯에 황망히 잃었다. 이듬해 아버지 없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얼굴로 농사를 짓던 어느 날, 엄마는 손에 쥐었던 호미를 내려놓고 농사일을 접었다. 힘쓰는 일이 태반인 농사일을 아래로 셋 남은 어린 자식들과 계속할 수는 없었다. 대도시 의류공장에 다니는 딸 둘이 보내는 돈은  아이들 학교 공부시키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시집보낸 딸 셋은 자기들 앞가림하기에도 벅찼다. 결국 엄마는 버스로 30분 거리인 가까운 읍내의 식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눈썰미 있고 손맛과 부지런함을 타고난 엄마는 식당 아줌마가 되어 하루하루를 살았다. 엄마가 다니는 식당의 주방이 엄마의 손길로 반지르르해질 때, 성그렛골 부엌에서는 열다섯 살 여섯째 딸이 어설픈 엄마 노릇을 하느라 한숨을 늘어지게 쉬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성그렛골에 버스가 들어왔다. 성그렛골을 오가는 이 버스를 놓치면 면사무소가 종점인 버스에서 내려 꼬불꼬불 오르막 시골길을 30분은 족히 걸어야 성그렛골에 도착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하는 막차는 9시다. 그 시간도 놓치면 엄마는 종종 일하는 식당에서 자야 했다. 그럼 여섯째 딸은 이른 아침 버스비를 뒷집 아줌마한테 몇 번이나 망설이다 빌려야만 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는 걸 여섯째 딸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어느 겨울, 발이 푹푹 빠지게 눈이 오던 날.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마무리를 하느라 엄마는 면사무소행 마지막 버스를 놓쳤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던 엄마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여섯째 딸은 뒷집에서 버스비 빌리는 걸 무엇보다 싫어했다. 엄마 아닌 엄마가 되어버린 여섯째 딸이 내일 아침에 또 뒷집에 가서 차비를 빌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면사무소까지 도착했다. 간간이 지나는 사람들이 있어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간은 밤 열 시를 넘겼고 중간마을을 지나면 불빛 없는 시골길을 걸어야 했다. 날씨는 포근했고 하얗게 빛나는 눈빛과 부연 달빛이 엄마의 등을 가만히 감싸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빛, 달빛이 있어도 늦은 밤 홀로 걷는 길은 무섭다. 엄마는 면사무소에서부터 뛰다시피 걸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마흔다섯에 떠나보낸 아버지가 그립고 아쉬운 마음이 무서움을 뚫고 자라났다.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진다. 몸에서는 열이 나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후드득 눈에서 눈물이 난다. 서러움은 무서움도 몰아내나 보다. 너무 젊어 세상 버린 아버지가 그립다. 소리 없이 대문을 연다. 아래채 불이 탁 켜진다. 딸이 엄마 오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살구나무집 마당에 소복소복 눈이 쌓이던 이 밤을 엄마와 여섯째 딸은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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