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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팔남매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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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모래시계 Oct 21. 2023

58년생 첫째, 영숙

1958년 4월 19일 새벽에 태어난 영숙은 여름 한낮에 태어나 늘어지게 편한 개 팔자를 닮았어야 했다며 늘 자기가 태어난 때를 아쉬워한다.


새파랗게 젊은 아버지와 엄마는 대처로 나가며 영숙을 외할머니한테 맡겼다.

영숙의 외할머니는 온 동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남편을 다그치고 손녀딸을 내몰았다. 7살 영숙은 그래도 이때가 가장 행복했다. 외할아버지는 순한 양처럼 외할머니에게 고분고분하며 영숙을 이렇게 챙기고 저렇게 다독이며 어화둥둥 싸고돌았다. 맛난 것도, 신기한 것도 모두 영숙만을 위한 것이라 수줍음 많이 타는 영숙도 빙그레 웃는 날이 많았다. 야멸찬 외할머니도 손녀를 싸고도는 외할아버지를 어쩌지 못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영숙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 인천 큰 고모네 어린 식모로 가야 했다. 금이야 옥이야 살펴주던 외할아버지, 무서워도 늘 따뜻한 끼니를 해주시던 외할머니의 그늘을 떠나는 날 영숙은 엄마 아버지가 너무 미워 그만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큰고모가 성그렛골로 영숙 씨를 데리러 왔다. 대도시의 이층 양옥집을 보는 순간 영숙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말로만 듣던 이 층 양옥집이 눈앞에 있으니 마냥 신기했다. 하루하루 식모 아줌마의 허드렛일을 함께 하던 영숙이 석 달도 되지 않아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여름밤에 큰 고모집에 머릿수건을 쓴 엄마가 영숙을 데리러 왔다. 이부자리에 바짝 마른 장작처럼 누워있는 영숙을 보는 순간 엄마는 할 말을 잃고 주저앉았다. 영숙은 그런 엄마를 보며 찔끔 눈물이 나고 심장 언저리가 아렸다. 줄줄이 여동생들만 가득한 집으로 드디어 영숙이 돌아왔다. 아직도 아버지와 엄마는 아들을 낳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여전히.


 일곱 번째로 아들을 낳고, 여덟 번째도 아들이겠거니 마지막 힘을 주었으나 막내딸을 하나 더 나은 엄마는 영숙이 스무 살이 되자 아주 좋은 혼처를 구해 시집을 보내고자 했다. 엄마는 오래도록 부모를 떠나 있던 첫 딸에게 외할아버지를 닮은 다정한 남편을 찾아 맺어주고 싶었다. 


동네 방앗간 권 씨의 조카랑 영숙이 집에서 맞선을 본다. 영숙은 하얀 블라우스에 긴 검정 치마를 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배움은 짧았지만 다정한 외할아버지의 정을 듬뿍 받은 영숙은 얌전하고 영특해 보였다. 영숙이 마음에 든 방앗간 권 씨의 조카는 한 달 만에  영숙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만난 지 두 달 만에 영숙은 동생 희숙과 동네가 떠들썩하게 합동 전통혼례를 올렸다.


 엄마와 달리 쑥쑥 아들만 둘을 낳은 영숙은 남편을 따라 마산, 안동, 논산 등등을 떠돌다 대전시 주택가에 꿈에도 그리던 자기 집을 지었다. 집을 다 짓고  이사 들어가던 날, 영숙은 멀찌감치 서서 자기 집을 바라보았다.  어린 영숙이 보았던 큰 고모네 이층 양옥집이 영숙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영숙은 1층 바깥쪽 방에 출입문을 하나 더 달아 내고, 바깥에 화장실을 하나 더 만들어 얌전한 아가씨에게 세를 놓았다. 2층도 독채로 세를 놓았다. 집 안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책꽂이로 사용했다. 나중에 대출금을 다 갚으면 2층을 아들들 방으로 써야겠다는 야무진 계획도 세웠다. 영숙은 엄마의 바람대로 아내와 자식들을 끔찍하게 아껴주는 남편과 알콩달콩 재밌게 살았다. 


 어느 날 반도체 공장을 다니던 여섯째 동생 기남이 대학을 언니 집에서 다니고 싶다며 찾아왔다. 남편은 배워야 한다면서 그러라고 했다. 영숙은 달랑 방 2칸인데 그럼 동생은 어디 재워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설움 중에 최고 설움은 못 배운 설움이라고 생각하는 영숙은 기남이 학력고사 치르는 날 새벽에 도시락을 싸고, 동생이 시험을 치는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학 정문 앞을 서성거리다 시험 끝나는 시간에 고사장 현관에서 동생을 기다렸다. 환한 얼굴로 고사장을 나오던 여섯째 기남은 시험에 합격했고, 졸업 후에 선생님이 되었다. 


엄마와 영숙은 여섯째 기남을 섬에 데려다주고, 첫 출근하는 것을 지켜 본다음 돌아오는 길에 같이 손을 잡고 꺼이꺼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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