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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팔남매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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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모래시계 Oct 21. 2023

64년생 넷째, 현영

아버지와 엄마는 가끔 골치 아픈 현영의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현영의 못 말리는 끼는 서로 당신을 닮았네 마네 실랑이를 벌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언니인 현숙이 있는 신발공장 기숙사로 간 줄 알았던 현영은 성그렛골에서 과수원과 논밭이 제일 많은 우물집 셋째 아들과 서울로 도망을 갔다. 엄마가 데려다준다고 해도 자기를 바보로 아냐며 엄마를 안심시키고는 혼자도 아니고 남의 집 귀한 자식을 꼬드겨 내뺀 터라 아버지와 엄마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딸자식 교육을 그 따위로 시켰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우물집 마나님에게 엄마는 그저 묵묵히 '당신 자식도 마찬가질세'라는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사흘도 안 돼서 성그렛골로 잡혀온 셋째 아들은 다시 농고를 다녔고 엄마는 현영을 현숙이 있는 신발공장 기숙사 방까지 데려다주며 현숙에게 현영 단속을 부탁했다. 


  일 년 후 현영은 둘째 언니 희숙이 있는 도시의 섬유공장으로 현숙과 함께 거처를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영의 춤바람 소문이 성그렛골까지 퍼졌다. 현영은  한밤중에 뾰족구두를 신고 몸에 착 붙는 드레스를 입고 도시를 휘젓고 다녔다. 희숙과 현숙이 힘을 합쳐 머리채를 잡고 가위로 싹둑싹둑 야멸차게 잘라도,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며 악다구니를 써도 밤이면 밤마다 현영은 빙글빙글 차차차 춤을 추고 새벽에 돌아왔다. 결국 아버지와 엄마는 현영을 성그렛골로 다시 데려와 학교 다니는 동생들 도시락을 싸주며 집안에만 있으라고 엄포를 놓고, 밖으로 나돌면 호적을 파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볕 좋은 날 현영은 들마루에 앉아 동생들을 순서대로 무릎에 눕히고 서캐를 잡아주고, 농사일에 바쁜 엄마가 절대 싸주지 않는 계란말이나 김치볶음을 도시락 반찬으로 넣어 동생들을 신나게 했다. 열흘이 지난 뒤 현영은 아버지와 엄마에게 이제 춤추지 않겠노라 맹세를 하고 다시 현숙이 있는 공장 기숙사로 돌아갔다.


 어느 해 여름 일요일, 현영은 같이 공장에 다니는 도시 친구들 몇 명을 성그렛골로 데려와 장마로 물이 많아진 화도랑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현영과 친구들이 물놀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옹기종기 이런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때 이 선생이 왔다. 이 선생은 몇 년 전 강릉에서 이사와 아랫동네 버스정류장 바로 옆 기와집에 살았다. 이 선생은 채소며 잡곡이며 쌀을 그 자리에서 귀한 현금을 바로 주고 사가는 아버지의 단골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엄마에게 술상을 차리라고 했다. 


들마루에 술상이 차려졌다. 빼어난 바이올린 연주로 스무 살 아래였던 부인을 홀려 결혼한 이 선생이 차에서 바이올린을 꺼내와 켜기 시작했다. 이 선생과 함께 온 친구 나 씨 역시 기타를 신들린 듯 연주했다. 바이올린 선율과 기타 소리가 현영과 친구들의 노랫소리에 함께 버무려진 일요일 오후. 서산으로 지는 해가 호두나무 그림자 키를 키우고 엄마가 만든 꽃밭에서 솔솔 뿜어져 나오는 여름꽃 향기와 스무 살을 목전에 둔 생기 가득한 젊은이들이 이제 막 물놀이를 마친 말간 얼굴로 웃으며 노래하던 그날을 현영은 잊지 못한다. 팝송을 멋들어지게 불러 현영이 분위기를 띄웠다. 뽕짝부터 애절한 발라드까지 현영은 숨겨놓은 끼를 한 자락 한 자락 펼쳐놓았다.

 아버지와 엄마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 현영이가 난 춤바람이 그 춤바람이 아니었나 보네. 그냥 현영이는 노래와 춤을 타고난 거네.”

 기타를 치던 나 씨 아저씨는 미국 LA로 이민 갈 예정이었다. 현영의 끼를 한눈에 알아본 나 씨는 현영을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현영은 인물 좋은 청년과 연애를 1년 하고 결혼했다. 현영의 남편은 인물 빼곤 쓸 데가 하나도 없었다. 큰 언니 영숙이 어렵게 사는 현영을 보다 못해 현영의 남편을 대전 사업체에 취직시켰다. 현영은 큰 언니와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아들 하나를 키우며 안정된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그러나 평소에는 순하디 순한 남편이 술만 먹으면 돌변하여 도저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혼과, 아들을 둘러싼 양육권 다툼 등으로 현영은 지옥을 헤매는 1년을 보냈다. 현영이 아들을 키우는 걸로 정리가 되었다.


현영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도서관 매점부터 포장마차까지 밤낮없이 일해도 세상은 버거웠다. 결국 현영은 아들을 시댁으로 보내고 남동생 집에 얹혀살았다. 현영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어떤 것도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할 수 없었다. 


어떤 삶의 끄나풀도 없던 현영에게 천사 같은 지금의 남편이 다가왔다. 그는 가진 것은 적었지만 넓은 마음과 톡톡 튀는 유머로 현영을 웃음 짓게 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아 현영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차츰 현영은 밝고 명랑한 모습을 되찾았다. 대도시 주택가에 작은 슈퍼를 현영과 남편은 있는 힘껏 꾸려 나가고 있다. 친정 남동생한테 SOS 전화가 왔다. 현영은 언제나처럼 앞치마를 벗어던진다. 그런 현영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남편에게 현영이 손을 흔들며 슈퍼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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