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심폐소생술

1. 명언은 명언인 이유가 있다.

by 장쩸마

'잘 하고 있어.'


내 근황을 아는 지인들에게서 요즘들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가끔은 이 말을 되뇌인다.


'나, 잘 하고 있어.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일상을 잘 살아가는 듯 하다가도, 한 번씩 무너지는 날이 있다.


트리거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날은 세탁기였다.


아이를 데리고 나와 둘이 살게 된 8평 남짓한 오피스텔의 세탁기는 처음부터 말썽이었다. 빌트인으로 인덕션 아래 설치되어 있는 세탁기는 국내 전자제품 양대산맥 중 하나인 브랜드였지만, 설치가 잘못 된 건지 아니면 오피스텔의 문제인지 헹굼 차례만 되면 앞으로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소리도 어마무시 커서 꼭 지진이라도 난 것 같다.


AS를 불러서 수평을 맞춰봤지만 그때 뿐, 소용이 없었다. 아무런 성과 없이 출장비만 몇 만원씩 나가자 AS 부르는 건 포기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대안이 누르기다. 쿵쿵쿵 집안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튀어나오는 세탁기를 온 힘을 다해 누르면 어느정도는 튀어나오는 거리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잘못 누르면 세탁기가 벽에 부딪히는 굉음이 울리고 이러다가 세탁기가 부서지는 건 아닌가 덜컵 겁이 난다. 그러면 누르는 손의 위치를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본다. 그러는 새 세탁기는 벌써 한뼘 이상 튀어나온다.


그러다 운 좋게 알맞은 곳에 손이 닿으면 진동이 조금은 줄어들며 더 이상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손으로 막고 있으면 온몸이 덜덜덜 세탁기와 함께 떨린다. 그걸 30분 내내 하고 있다 보면 현타가 오는데, 그때는 멍하니 있으면 안되고 휴대폰으로 재밌는 영상이라도 봐야한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세탁기가 굉음을 내며 부딪히고 긁히는 소리를 내며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손 위치를 바꿔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원을 껐다가 다시 돌려도 마찬가지.


"진짜 왜 이래..."


굉음을 내며 몸체를 밀고나오는 괴물같은 세탁기를 끌어안고 결국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인생 진짜 나한테 왜 이래? 이때까지 한 걸로 모자라?

그래서 세탁기까지 나한테 이래야겠어?

어디까지 할 건데? 끝은 있니?


지금 내게 온 불행의 끝이 있기는 한 건지. 이 상황에서 더 나아지는 날이 오기는 하는지.


그 확신이 없는 마음은 언제나 위태롭다.

툭 건드려지기만 해도 무너질 만큼.


나는 그날 정말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동안 꽤 괜찮게 잘 견뎌왔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사실은 괜찮은 척 애써왔던 날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나보고 잘 하고 있다고. 정말 잘 견디고 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만,

정작 내 속의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한참을 울다가 지쳐서 바닥에 드러누워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싶다.


이럴땐, 그 순간 만큼은 정말이지 죽음 밖에 답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을 놓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죽음을 감히 실행에 옮길 용기도 없다.


그렇지만 현실을 살아내자니 그 고통스러움에 다시 죽음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무한 반복이다. 절망의 무한궤도.


그런데 신기한 건, 이 죽을 것 같은 순간만 어떻게든 버텨내면, 이 순간만 지나가면 또 어느정도 살아진다는 거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솔로몬의 명언은 정말이지 괜히 유명한 것이 아니다.


담담히 일상을 살아내려 노력하다가 한번씩 무너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 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 반드시.


그리고 다음날 눈을 뜨면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다. 처한 상황이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똑같다 하더라도, 펑펑 울면서 마음 속에 쌓이고 고여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난 오늘은 분명 어제와는 다르다.


여전히 고통스럽더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어제의 그 순간보다는 평온하고 덜 쓰리다면,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날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한 시작이다. 그 시작이 너무나도 미약해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내 고통스러운 삶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 것 같아 보여도, 분명 그 시작을 이뤄낸 당신의 마음은 앞으로 나아갈 첫 걸음을 뗐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요즘 내게는 많은 위로가 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에 용기를 얻어 또 며칠 잘 살다가도 무너지는 순간은 또다시 찾아올 수 있다. 며칠이 아니라 당장 내일이라도.


하지만 그 순간 역시, 지나간다. 그러면 또 새로운 날이 찾아온다.


이런 말들이 너무 흔한 말이라 아무 감흥이 없는 것 같아도, 명언은 명언인 이유가 있다.


그냥 말이잖아. 그 말이 뭐, 내 상황을 해결해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명언은 말일 뿐, 당연히 내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내 상황은 내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 무엇도 그걸 대신해 줄 수는 없다.


명언은 힘든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힘은 희망이다.

지금보다는 나아지리라는 희망.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


이것 없이는 끝없는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 힘든 거, 다 지나가.

할 수 있어. 그리고 잘 하고 있어.

힘을 내.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희망.


현재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스스로 희망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지펴줄 수 있는 말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며칠 전 친구의 옛날 프로필에서 보고 펑펑 울었던 글귀가 있다.


Not all storms come to disrupt your life, some come to clear your path.


모든 폭풍우가 네 삶을 무너뜨리려고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폭풍우는 네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려 오기도 한다.


이 말은 그날 내 마음의 심폐소생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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