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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젬마 Jul 10. 2024

마흔의 고백

<3> 바닷가에서

나는 너를 쫓아내는 첫 방법으로 너를 덜 보는 쪽을 택했다. 같이 수업을 들을 때도 일부러 조금 늦게 가서 뒷자리에 앉거나 점심을 먹으러 갈 때도 다른 약속이 있다며 무리에서 빠졌다. 그러다 기말고사가 시작되었고 도서관에 늦게까지 남아있게 되자 대현을 보게 되는 일도 줄었다. 다행이었다. 


시험공부에 매진한 나는 기말고사를 훌륭히 치러낼 수 있었다. 스스로가 대견했고 대현을 내 마음속에서 완전히 밀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시험이 끝났으니 다 함께 놀러 가자는 동기들의 말에 선뜻 그러마 했던 것도 이런 자신감의 발로였다.     

 

방학이 시작되고 처음 맞는 주말이었던 것 같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누군가의 주장에 따라 빠르게 의견 일치를 본 동기들은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는 계획을 무려 이틀 만에 완성해 냈다. 그리고 드디어 여행 당일. 기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바다를 볼 생각에 설레었던 생각이 난다.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을 살랑이게 한다. 마흔이란 나이를 먹은 지금도 그러할 진데, 당시 스물하나였던 내 마음은 오죽했을까. 그러므로 대현과 함께한 여행은 그것이 동기들과 다 같이 가는 단체 여행이었을지언정 결코 내 마음에 안전한 여행이 아니었다.      


일단, 첫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내가 역에 도착했을 때 동기들은 절반 이상 이미 와서 모여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대현을 가장 먼저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아냈다기보다는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사람이 대현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날 대현은 평소랑 비슷하게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다른 동기들과 그다지 다른 차림도 아니었고 특별히 더 눈에 띄는 구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대현이었다.


대현은 다른 동기랑 이야기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대현에게 향한 눈이 그곳에 대현밖에 없는 듯 그에게서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가무잡잡하고 갸름한 얼굴, 웃을 때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 올라가는 입꼬리. 대현이 웃는 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대현이 나를 보기 전에 얼른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문득 이번 여행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이상 바다를 보는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되도록 대현과 말을 섞지 않고 남은 이틀을 보내 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러한 결심이 무색하리만치 기차 안의 나의 자리는 대현과 아주 가까웠다. 내 바로 대각선 앞자리. 나는 라희와 함께 앉았고 우리 앞자리에는 대현과 종현이 앉았다.


대현이 앞자리에 앉은 것만큼 내게 불편한 것이 또 있었는데, 바로 라희와 종현의 관계였다. 


그 당시에는 ‘썸’이라는 말이 없었으니 둘의 관계를 ‘썸 타는 관계’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그건 완벽한 썸이었다. 나는 종현이 라희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종현은 라희에 대한 관심을 감추지 않았으므로, 아마 누구라도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희는 종현의 이성적 관심에 마음이 있는 듯 없는 듯 애매하게 굴었다. 오늘도 종현은 기차가 가는 내내 뒤를 돌아보며 라희에게 말을 걸었다. 저러다 담 걸리겠다 싶을 만큼 고개를 뒷자리에 고정한 종현이 조금 안쓰러웠던 나는 아예 자리를 바꿔줄까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대현의 옆자리에 앉아야 했다. 나는 종현에게 속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삭히며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대현의 옆에 앉아 두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내가 옆자리로 가면 대현의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분명 내게 선을 그었는데 (그것도 아주 강력한 직구를 던져서) 내가 옆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그 선을 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고 그런 오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그날의 수치심이 생각나 열이 올랐다.      


대현은 종현과 종종 대화를 나눴고 바로 앞에서 나누는 말소리는 기차 소리에 묻혀 간간이 내 귀에 들려왔다. 둘 사이에서 여자 동기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는 나도 모르게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혹시 내 얘기는 안 나오나 더 신경을 바짝 세웠던 것이 기억난다.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러운 소음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하는 짓이 스스로 우스워 헛웃음을 흘렸던 것도 같다. 아무튼 나는 별로 생산적이지도 않은 일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온 신경을 털리고 말았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기차에서 내렸다.


바다는 그런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비릿하고 시원한 바다 내음을 가득 들이키자 내가 온통 바다가 된 것 같았다. 바다가 주는 이런 느낌은 늘 좋다. 끝없는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여자 동기들과 숙소에 짐을 풀고 나온 나는 물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모자를 쓰고 모래사장에 앉아 동기들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희는 일찌감치 물에 들어가 동기들한테 물을 뿌려대며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라희 옆엔 역시나 종현이 있었다. 까르르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니 라희가 마음만 열면 종현과 썩 잘 어울리는 연인이 될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들이 가진 젊은 기운은 싱그럽고 예뻤다.


대현이 동기들과 물속에서 조금 장난을 치다가 이내 나와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누나는 왜 가서 안 놀아?”


대현이 물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라희랑 종현이 보는 재미가 쏠쏠해.”


나는 둘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대현이 소리 내서 웃었다. 


“종현이가 라희한테 얼른 고백을 해야 할 텐데.”


대현이 내 옆에 펼쳐진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옆에서 보는 내가 다 애가 타는데.”


나도 맞장구치며 말했다.


“그런데 라희가 종현이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대현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흘끗 보고는 바다에 눈을 고정했다.


“글쎄. 내가 물어도 애매하게만 대답해서.”


“내가 보기에 라희는 그다지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 보여?”


“응.”


“저렇게 보면 꽤 그림이 괜찮지 않아? 놀 때는 또 저렇게 잘 어울려 노는데.”


반짝이는 바닷물 속에서 라희와 종현은 뭐가 즐거운지 연신 깔깔대며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다른 동기들과는 조금 떨어져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도 보였다. 


“그렇긴 한데... 라희가 마음이 있으면 저렇게 뜸을 들이겠어? 종현이가 자기 좋아하는 거 뻔히 다 보일 텐데.”


“그렇지.”


“차라리 라희가 선을 그으면 좋을 것 같은데.”


대현의 말에 문득 내게 칼같이 선을 그었던 대현이 떠올랐다. 


넌 선 긋는 거 참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종현이가 엄청 아플 거야. 마음이.”


“...”


“봐바, 저렇게나 좋아하잖아. 라희는 그래서 말을 못 하는 걸 수도 있어.”


대현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는 생각 안 해봤는데.”


그렇겠지. 


“종현이 같이 여린 성격에 라희가 싫다고 그만하라고 하면 종현이 엄청 상처받을걸. 라희도 아는 게 아닐까? 저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종현이도 스스로 깨달을 날이 올 거라고.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하고.”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잖아. 희망 고문일 수도 있지 않아?”


대현이 마치 무언가에 항변하듯 말했다.


“희망 고문이어도 그건 좋아하는 사람이 어차피 감당해야 할 몫이야. 넌 네가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그만 좋아해 달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글쎄...”


넌 모르지? 진짜 엄청 아파.


“종현이가 주변에서 맴도는 게 마음에 안 들고 싫었으면 라희도 더 단호하게 대처했겠지. 근데 라희도 종현이랑 같이 노는 거 좋아해. 종현이라는 사람 자체는 좋으니까. 만약 라희가 단호하게 끊으면 그런 종현이랑 어색해서 더 이상 못 볼 수도 있잖아. 굳이 좋은 사람 떨쳐내면서까지 그래야 해? 상처 주면서? 심지어 고백도 안 했잖아.”


대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대현이 입을 열었다.


“.... 라희가 종현이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거잖아.”


나는 대현 쪽으로 눈을 돌려 바다를 보고 있는 대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대현의 얼굴은 뭔가 복잡해 보였다. 대현이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렇지 않아?”


나에게 확신을 얻고 싶은 것처럼 대현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런 대현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바다로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아닌 것 같아. 좋아하는 마음 알면서 종현이에게 여지를 주는 듯이 같이 어울리는 라희가 네 눈에 좋지 않게 보일 수는 있는데, 종현이 입장에서는 그게 엄청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일 수도 있어.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 종현이가 고백이라도 하면 라희가 거절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고백도 안 한 마당에 종현이한테서 굳이 그걸 뺏어야 하나.. 난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대현이었다.


“그러면 누나는... 만약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라희처럼 해주는 게 더 나아? 선을 긋는 거보다?”


“... 응.”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주체는 나다. 그 마음을 그만둘지 말지에 대한 판단은 적어도 내 마음의 주체인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구나.”


조그맣게 대답하는 대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너, 누구 좋아해 본 적 없지?”


“뭔 소리야. 당연히 나도 있지.”


대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진짜 진짜 좋아해 본 적 있느냐고. 초딩 때 같은 반 누구 좋아했어 이런 거 말고.”


내가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자 대현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없구나?”


내가 웃으며 물었다.


“그런 건.. 그러고 보니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대현이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네가 누군가를 정말 심장이 조일만큼 좋아한 적이 있다면. 그래서 너무나 힘들어한 적이 있다면, 넌 내게 던졌던 그 말을 하기 전에 한 번쯤은 더 고민했을 테고... 그럼 내가 시속 160 킬로미터의 직구를 그런 식으로 얻어맞는 일은 없었을까?     


나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아이스박스에서 음료수를 꺼내 대현에게 먹을래? 물어보았다. 아니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대현은 잠시 숙소에 갔다 온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대현이 멀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대현이 앉았다 간 의자 위에는 대현이 쓰던 파란색 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그 수건을 바라보고 있자니 대현이 그 자리에서 어떤 표정으로 웃었는지, 말했는지, 침묵했는지 하나하나 떠올랐다. 나는 떠오르는 상념들에 의식을 맡기고는 달콤한 음료수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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