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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젬마 Jul 05. 2024

마흔의 고백

<2>  너라는 사람

지금으로부터 19년 전, 너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너라는 사람이 내 마음에 들어온 후 내 마음에 어떤 광풍이 몰아쳤는지 생각하면 어이없다 싶을 만큼 너의 첫인상은 강렬하지 않았다. 


처음에 너는 같은 과 동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같이 듣는 수업이 몇 개 있었고, 같이 어울리는 무리 속에 네가 있었지만 너는 사정이 있어 일 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던 내게 있어 한 살 어린 동생이었고, 도서관에서 같이 숙제하고 밥을 먹는 무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 하고 얼굴이 가무잡잡했으며 말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쌀쌀맞고 까칠하기도 했다. 다른 남자 동기들이랑은 장난도 잘 쳤는데 유독 너랑은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걸렸었다. 


그러다 언제부터 네가 내 마음을 열고 들어왔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네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가질 않았다. 마치 자신이 그곳의 터주대감인양 깊숙이 들어앉아서는 아무리 밀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네가 버거웠다. 너를 볼 때 내 마음은 무수한 빛으로 반짝거렸지만 그 빛은 언제나 너에게서 반사되어 돌아왔다. 나는 그 따가운 빛에 눈이 시려 고통스러웠다.      


너에 대한 많은 것들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지만, 그중에서도 딱 하나를 꼽자면 그건 바로 너의 진중함이었다. 너는 남의 부탁을 선뜻 들어주는 법이 없었지만 들어주겠다고 한 부탁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주었다. 너는 빈말을 하는 경우도 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너에 대한 내 마음의 뿌리는 아마도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당시 너에 대한 내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나는 네가 옆에 앉으면 수업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네가 내 바로 왼쪽 옆자리에 앉은 날이 있었다. 나는 그날 필기를 하나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글씨 따위가 써질 리 만무했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귓가에 계속 맴돌아서 오른쪽 옆자리에 앉은 다른 남자 동기에게 들릴까 봐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생기는 이 몸의 반응이 드라마나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과장된 표현인 줄 알았다. 실제로 이런 몸의 반응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경험해 보니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네가 가방을 챙겨 일어서자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책상에 엎드려 뻗어버렸다. 오른편에 앉았던 남자 동기가 나가자고 채근했다. 


“야, 뭐 해. 가자.”


“나 조금만 있다 갈게. 먼저 가.”


내 고개는 고집스럽게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온 신경은 왼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누나, 왜? 어디 아파?”


왼쪽에서 대현이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먼저 가.”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대현과 동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먼저 간다며 강의실을 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잦아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쿵쾅대던 심장의 광란이 서서히 스러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내 심장은 자주 나를 곤란하게 했다. 나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행동했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흘러넘쳐 네가 알아채는 일이 없도록. 너의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당시 너는 여자친구가 없었고, 나는 네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할까 많이도 궁금해했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동기들이랑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네게 물었었다. 


“대현아, 너 좋아하는 사람 없어?”


“없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너는 어떤 스타일이 좋아?”


동기 여자애 한 명이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관심 없는 척 딴청을 피우면서도 귀는 쫑긋 세우고 너의 대답을 기다렸다.


“딱히 그런 거 없는데.”


“그런 거 없는 게 어딨어.”


질문을 던진 여자 동기가 맥 빠진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남자 동기 한 명이 대현의 편을 들어주었다. 


“야, 없을 수도 있지. 필이 딱 와야 되나 보지.”


그 말에 대현이 웃었다. 

네 웃는 모습에 동기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맞네! 필이 꽂혀야 되는 거네!”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나와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서늘한 바람이 맨살에 닿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초여름이라 아직은 해가 지면 서늘했다. 가방에 넣어둔 카디건을 가지러 갈까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다시 들어가 대현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필이 꽂혀야 한다라... 


벌써 한 학기가 끝나가는 초여름인데 아직이라면, 역시나 아닌 것이겠지.


너에게 나는 아닌 거구나.


간접적으로나마 네 마음을 알게 되어 내 마음은 풀이 죽었다.


추운데도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어서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가게에서 나왔다. 누군지 보려고 얼굴을 들었는데 거기에 네가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어, 그냥.. 술 깨려고.”


나는 눈을 피하며 괜히 추운 팔을 쓰다듬는 척했다. 그러자 대현이 말했다.


“추워? 옷 갖다 줄까?”


“아니야. 괜찮아. 금방 들어갈 거야. 너는 왜 나왔어?”


“화장실 가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난 들어가야겠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대현은 종종걸음으로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다시 자리로 돌아간 나는 술을 조금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는 동기들과 헤어져 제일 친한 대현, 종현, 라희와 근처 광장에서 숙취해소제를 먹었던 것도 같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장면들 속에서 종현과 라희가 같은 방향이라 손 흔들며 가는 장면, 그리고 너와 나 둘만 남아있던 장면은 다음 날 잠이 깨서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네가 했던 그 말만큼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다. 그때 그 말을 하던 너의 표정, 그때 불던 바람 소리, 그리고 화가 나고 부끄럽고 슬펐던 나의 감정까지도.       


그때 우리는 술자리의 연장선에서 너의 이상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너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누나는 아니야.”


너의 눈은 웃고 있었고 마치 농담인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알았다. 넌 농담이라도 빈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는 걸. 그 속에 너의 진심이 있다는 것을. 


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너무나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렇게 숨기려고 했음에도 숨겨지지 않았구나. 너는 다 알고 있었구나. 딱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을 만큼 무안스러웠다. 


내가 너의 그 말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집에 가자고 했을까, 아니면 ‘나도 너는 아니야’라며 농담처럼 맞받아쳤을까. 


그 이후로도 별로 어색하지 않게 나를 대했던 너를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별 상관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너의 그 말에 내가 어떤 대답을 했든, 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내 마음에 대한 거절의 의미를 담아 시속 16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직구를 나에게 던졌음을.     


나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너를 대했지만,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날아드는 직구를 아무런 방비도 없이 얻어맞은 그때의 내 마음은 넝마나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아니야.’


참으로 잔인한 말이었다. 그 말이 내게 얼마만큼의 상처가 될지 너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그 말을 뱉었다. 


나쁜 놈.


자신은 내 마음을 알고 있지만, 그 마음에 응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굳이 그런 식으로 내게 전해야 했을까. 


내가 부끄러웠던 만큼 나는 네가 미웠다. 그리고 분했다. 그런 너를 좋아하는 내가 싫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에 지고 마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너를 내 안에서 쫓아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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