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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젬마 Jul 04. 2024

마흔의 고백

<1> 15년 만에 다시


그날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에 시간이 조금 남아서 00 은행에 잠시 들렀다. 해외 송금을 하기 위해서였다. 해외 송금할 때 외에는 잘 이용하지 않는 은행이라 근처 어디에 은행 지점이 있는지 몰라서 핸드폰에서 지도 앱을 켰다. 내가 서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을 찾으니 다행히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지점이 있었다. 나는 지도를 보며 방향을 틀어 은행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때는 여름의 무더운 공기가 올 듯 말 듯 아직은 밀당을 하고 있던 6월 초. 아침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낮에는 해가 뜨거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청명한 날씨. 내가 좋아하는 날씨였다.


그 파란 하늘을 넋 놓고 감상하다가 그 속에서 쨍쨍하게 빛나는 해를 마주하자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감긴 눈꺼풀 위로 빨간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피어올랐다. 이런 날의 해는 눈이 부셔서 똑바로 마주 볼 수 없다. 잠시라도 똑바로 마주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는 해의 날 선 눈부심에 내 눈의 고통만 더 해진다. 나는 시린 눈을 거두고 잰걸음으로 은행 지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날은 웬일인지 대기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순서가 돌아올 법했다. 나는 기쁜 마음에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았다. 


휴대폰으로 친구와 무얼 먹을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 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어나 창구로 가서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창구 여직원이 물었다.


“해외 송금을 좀 하려고요.”


나는 대답과 동시에 가방에서 통장과 신분증을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컴퓨터 자판과 계산기를 두드리며 송금에 필요한 사항들을 질문하고 나는 그에 대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송금 절차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쯤 나는 문득 어떤 사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창구 안쪽 직원들의 공간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제 내 눈은 그 이미지의 실체를 찾아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물을 찾은 눈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역시... 너였구나.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10년 전쯤 00 은행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해외 송금을 하러 가끔 은행에 들를 때면 혹시나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곤 했지만, 한 번도 실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볼일을 끝내고 은행 문을 나설 때면 보지 못했다는 실망감과 보지 못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뒤섞여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는 했다. 그러다가, 전국에 00 은행의 지점이 몇 개인데 마주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끝으로 머릿속이 정리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 이 지점에 네가 있었다. 


사람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면 그 따가운 시선이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걸까. 다른 직원에게 말을 건네던 네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순간 시선이 얽히고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것은 너였다. 

같이 이야기하던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하더니 몸을 돌려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나는 네 얼굴을 보고 네가 나를 보고 놀랐다는 것과 나와의 재회를 조금은 반가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는 내 앞까지 오는 동안 큰 소리로 나를 부르거나 하지 않았고 그저 옅은 미소만 머금은 채 걸어왔다. 

나를 응대하는 직원 바로 뒤까지 온 네가 드디어 나를 불렀다.


“누나.”


예전처럼 부르는 그 목소리에 나는 이 예기치 못한 만남이 생각보다 당혹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이야, 대현.”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옅은 미소를 띠고 입을 뗐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응대하던 여직원이 나와 대현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과장님, 아는 분이세요?”


“네.”


그 짧은 대답에 여직원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누나, 지금은 시간이 좀 그런데, 언제 한번 보자. 연락처 주면 내가 연락할게.”


“어, 그래.”


대현이 내민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어 다시 건네자, 그는 짧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아까 이야기하던 직원에게로 돌아갔다. 


“어떻게 아시는 사이세요?”


여직원이 물어왔다.


“그냥 옛날에 알던 사이예요.”


“아, 그렇구나..”


여직원이 송금 처리를 마무리하면서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자신의 상사와 내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내심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직원의 궁금증을 채워줄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일 처리가 끝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다 되셨습니다.”


여직원이 내게 신분증과 통장, 그리고 송금 영수증을 건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조용히 소지품을 받아 가방에 넣고는 일어섰다. 은행을 나오면서 대현이 쪽을 흘끗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직원과 이야기 중이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벌써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은행 안에 있다 나오니 갑자기 더운 공기가 훅 덮쳐 오는 듯했다. 휴대폰을 보니 친구를 만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걷는 시간까지 하면 좀 늦을 것 같았다. 친구에게 10분쯤 늦는다고 미안하다고 연락을 해놓고 빠른 걸음으로 은행에서 멀어졌다.     

 

연락은 그날 저녁에 왔다. 대현이 치고 엄청 빠른 연락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누나, 다음 주 화요일에 혹시 시간 돼? 나 그날 건강검진인데 빨리 끝날 것 같아서.’


문자 메시지였다. 


‘그래. 다음 주 화요일 괜찮아. 몇 시쯤?’


‘2시쯤이면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자.’


장소는 대현의 건강검진센터 근처로 잡았다. 점심은 먹고 만나는 것이니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하고 헤어지면 되지 않을까.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4일이 남았다.     

 

그 4일 동안 나의 심리 상태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물론, 잔잔하던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에 파문이 일기는 했다. 호수에 던져진 것이 돌멩이가 아닌 커다란 바윗덩어리이진 않았을까 하는 걱정을 잠시 했지만 기우였다. 생각보다 파문은 크지 않았다. 


15년 만에 마주친 너의 모습은 옛날이랑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가무잡잡한 피부에 호리호리한 몸, 가라앉은 저음의 목소리. 잠깐 본모습이지만 크게 나이가 든 것 같지도 않았다. 20대에 오히려 성숙해 보였던 얼굴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 나는 어땠을까. 

당시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자 지난 세월을 그대로 담은 내 모습이 보였다. 

네가 나를 보고 실망했을까? 

잠시 스치듯 지나간 생각이었지만 곧 지워버렸다. 어차피 너에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관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가벼이 한 나는 4일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커피숍에 앉아 대현을 기다리고 있다.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을 먼저 왔다.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뭐 하나 집중해서 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어서 그런가. 애써 침을 꼴깍 삼켜도 보았지만 마음이 조금 퍼덕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어쩔 수 없는 기분을 나는 잘 안다. 19년 전에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된 내 마음속 요동은 너를 못 본 시간 동안 잠잠해졌다가 이제 다시 너를 만나 조금씩 또다시 나를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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