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 간다
벚나무 밑에는(桜の樹の下には)-카지이 모토지로(梶井基次郎)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건 믿어도 좋은 말이다. 왜냐하면 벚꽃이 저렇게나 흐드러지게 피다니 믿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 아름다움을 믿을 수 없어서 이 이삼일 동안 불안했다. 하지만 지금 겨우 알았다.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 있다. 이건 믿어도 좋은 말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에서 주인공 이츠키는 ‘오늘 집에 가는 언덕길에서 꽃망울이 한껏 부푼 벚꽃을 보았습니다.’로 시작되는 히로코의 편지를 받는다.
‘여긴 벌써 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라는 편지 내용에 이츠키의 친구는 “제 정신이 아닌가봐. 카지이 모토지로의 시에 나오잖아.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 절대로 입원해야 해, 이런 사람은.”라며 봄소식을 담은 편지를 보낸 히로코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츠키가 사는 홋카이도(北海道(북해도)) 지방은 일본의 최북단에 있는 섬으로 북동쪽은 러시아와 맞닿은 오오츠크해에 접해있기 때문에 바다가 얼 정도로 추우며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린다. 봄도 다른 곳보다 늦게 오기 때문에 봄을 알리는 벚꽃의 개화 시기도 일본에서 가장 늦은 5월초쯤이 된다. 아직 눈으로 덮인 홋카이도에서 낯선 사람에게서 받는 봄 편지란 벚꽃과 시체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개체였을 것이다.
일본의 벚나무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일본 사람들은 3월에서 4월에 걸쳐 봄이 시작하는 동안 벚꽃 등의 꽃을 감상하면서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는 하나미(花見, はなみ)를 갖는다.
일본 벚꽃축제의 대표적인 명소는 도쿄의 우에노(上野)공원이지만 옛날에는 ‘요시노의 벚꽃을 구경하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시노(吉野)산이 최고의 명소였다. 일본 전역에 가장 널리 분포하고 있는 벚나무가 바로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라는 종류이다. 소메이요시노 품종은 메이지(明治)유신 초기에 도쿄의 도요시마(豊島)구에 있던 소메이(染井)식목원에서 두 종류의 교잡종을 만들어 ‘요시노사쿠라(吉野櫻)’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요시노산이 있는 나라(奈良)지방은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곳으로, 538년 백제 제26대 성왕이 승려와 불경, 불상을 보내 불교를 포교하기 시작하면서 이때 제주의 왕벚나무도 함께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왕벚나무는 장미목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으로 높이가 15m 정도까지 자란다. 잎은 어긋나기로 나며 끝이 점점 좁아지는 타원 모양이다. 꽃은 4월 무렵에 흰색이나 연홍색으로 피며 꽃잎은 타원형 또는 넓은 타원형이다. 열매는 지름 7~8㎜의 둥근 모양인데 6~7월에 검은빛으로 익는다. 왕벚나무 외에도 올벚나무, 산벚나무, 섬개벚나무, 잔털벚나무등 이백여 종의 벚나무들이 있다.
구국의 뜻이 담겨 있는 벚나무
최근에는 고려시대에 몽골군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기 위해 만들었던 팔만대장경 판의 60%이상이 벚나무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벚나무는 짙은 적갈색으로서 조직이 치밀하여 전체적으로 고운 느낌을 주고, 너무 단단하지도 않고 무르지도 않고 잘 썩지도 않아 가공하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나무들의 껍질이 세로로 갈라지는 것에 비하여 벚나무 종류들은 가로로 짧은 선처럼 갈라지면서 표면이 거칠지 않고 매끄러워서 재질이 목판인쇄의 재료로 알맞았다.
벚나무의 껍질은 ‘화피’라고 부르는데, 활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재료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화피 89장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또한 조선 중종 21년 3월 22일에 “화피는 우리나라에서 금하는 물건인데 중국에 밀무역하여 우리나라에는 없게 되었다”라고 임금에게 아뢴 말이 있다. 이처럼 화피의 무역을 국가에서 금한 것은 바로 활을 만드는 데 쓰이는 중요한 군수물자였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설욕하려고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은 벚나무를 궁재(弓材)로 하고 껍질은 활에 감기 위해 수양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도록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북벌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효종의 구국의 뜻을 이어받아 벽암선사(碧岩禪師)가 심은 벚나무가 지리산 아래 구례의 화엄사 경내에 있는 수령 3백 년 된 천연기념물 제38호 올벚나무라고 전해진다.
왕벚나무의 원산지 제주도
왕벚나무의 자생지는 1908년 4월 선교활동을 하러 제주도에 온 프랑스인 타케 신부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한라산 해발 600m 지점인 관음사 부근에서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하고 표본을 채집해 독일의 식물학자 케네 박사에게 보내어 일본의 벚꽃 중 가장 유명한 품종인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와 같다는 감정을 받았다.
1932년 일본 교토대학의 고이즈미 겐이치(小泉源一) 박사는 소메이요시노 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의 왕벚나무라는 학설을 발표했다.
1962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박만규, 부종휴 박사 등이 제주도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발견하면서 명실공하게 제주도가 왕벚나무의 원산지임을 증명했다.
2001년 4월 산림청 임업연구원 조경진 박사팀은 DNA 분석을 통해 일본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 한라산임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연구팀은 한라산 자생 왕벚나무와 국내에 식재된 왕벚나무, 일본의 왕벚나무를 대상으로 DNA 분석을 한 결과, 제주의 왕벚나무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국내에 식재된 왕벚나무는 일본에서 다시 옮겨온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왕벚나무가 제주도 자생 올벚나무와 벚나무, 산벚나무 복합체의 교잡으로 발생한 종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이로써 일제강점기 이후 그 태생과 존치이유가 설왕설래했던 왕벚나무와 벚꽃마중을 즐기는 꽃놀이가 일본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국치의 감정은 많이 사그라져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벚꽃이 일본의 국화라는 반감정 때문에 도시 곳곳에 심어진 벚나무를 마땅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꽃 국화(菊花)
벚꽃은 화려하게 꽃피었다가 환상처럼 한순간에 저버리는 모습이 일본 무사들의 사무라이 정신에 비유되기까지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일본인들의 의기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나라꽃(國花)’이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대신에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꽃은 국화(菊花)이다. 12세기부터 일본에서는 일부 왕들이 국화를 문장으로 사용하였고, 1869년(명치2년)부터 정식으로 왕실 문장으로 결정되었다. 일본의 왕실 최고 훈장은 국화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야스쿠니 신사에도 국화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있다.
일본인들의 특성을 해석한 가장 유명한 책인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에서 국화가 상징하는 것이 일본 황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이미 고려시대의 중양절에 국화주를 담가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따르면 백제 진사왕(辰斯王) 390년에 백제인 왕인(王仁)이 일본에 갈 때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 색깔의 국화를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일본인들이 황실의 꽃으로 생각하는 국화 역시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분홍 치맛자락 봄바람에 날리며 떠나는 봄꽃 축제
우리나라의 봄은 제주도에서 시작된다.
제주도 서귀포 휴애리에서 열리는 매화축제를 시작으로 구례 산수유꽃축제와 광양 매화축제, 양산원동 매화축제, 진해 군항제, 여의도 벚꽃축제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봄꽃여행이 시작된다.
2019년 벚꽃의 개화 예정 시기는 제주도가 3월 22일이고, 대구와 부산이 3월 27일, 포항이 3월 27일이고 서울은 4월 5일순이다.
올해 벚꽃축제가 가장 빨리 열리는 곳은 대구 이월드로 3월 23일에 개막한다. 국내 유일의 야간 벚꽃축제인 ‘이월드 벚꽃축제’에서는 두류산 일대를 휘돌아가며 여의도 윤중로 보다 세배나 많은 벚꽃나무들을 볼 수 있다.
벚꽃 축제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진해 군항제’는 오는 4월 1일부터 열흘간 창원시 중원로터리 및 진해 일대에서 열릴 예정이다. 1952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북원로터리에 세우고 추모제를 거행한 것이 지금의 군항제로 발전한 진해 군항제는 세계 최대의 벚꽃축제로 유명하다.
2005년 제 1회 "한강 여의도 벚꽃 축제"라는 공식 명칭으로 처음 행사가 진행된 여의도 벚꽃축제는 해마다 4월초에 열리며, 국회의사당을 끼고 한강변을 따라 이어진 1.7km에 달하는 도로 양편에 1600여 그루의 왕벚나무가 만개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계절이라고 하지만, 벌써 스멀스멀 콧등을 간질이는 봄바람이 산 너머 남쪽으로부터 불어오고 있다. 봄바람을 타고 멀리 제주 바다에서부터 전해오는 꽃노래가 달착지근한 향기를 담고 풍겨오는 이른 봄날, 상큼한 봄꽃들과 함께하는 여행길은 나 혼자 떠나도 마음 넉넉한 잊을 수 없는 청춘의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