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희 백자 전시회 '미스트' (2. 5-20, 갤러리 도큐먼트)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김남준, 27세)은 지난 2019년 11월 17일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공식 SNS 계정을 통해 “달항아리”라는 글과 함께 2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 사진에서 RM은 한 손에 달항아리를 안고 방긋 미소짓고 있다. RM이 안고 있는 작품은 도예가 권대섭의 달항아리다.
나는 이 때만 해도 RM이 연예인의 겉멋이나 허세 내지는 지적 허영심, 혹은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 저런 행위를 하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틀렸다. 우연히 전시를 관람하는 그와 대화를 나눈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전문가 뺨칠 정도로 해박한 미술 지식을 갖고 있어 놀랐다"며 "헌책방에서 절판된 미술 서적을 찾아내 잘 알려지지 않은 월북 작가까지 깊이 연구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RM은 지난 2월 10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1930~1950년대 한국 화가와 문인의 교유를 다룬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두 시간 넘게 관람했다고 한다. 특히 월북 화가 최재덕이 섬세한 색채 변화와 대담한 구도를 보여준 그림 `한강의 포플라 나무`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RM은 그 이전인 지난해 9월에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 1억원을 기부했고, 이 돈은 미술관을 접하기 어려운 전국 산간지역 도서관과 학교에 전시도록 4000권을 보급하는 데 쓰였다.
예술과 미술품에 대한 그의 '찐 사랑'과 깊이는 방명록에 남긴 글만 보아도 금방 드러난다. RM은 1월 6일 서울 현대화랑에서 열린 화가 장욱진 30주기 기념전에 남긴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저도 심플하게 살고 싶습니다. 장욱진 짱."
그런데 `심플`은 장욱진의 작품 세계의 화두다. 고인은 생전에 "나는 심플하다"고 강조하면서 세상 만물을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로 압축해 작은 그림에 담았다. 삶의 이상향도 그랬다.
장욱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롱과 서랍 안에는 고작 러닝셔츠와 팬티 몇 개, 양말 몇 켤레에 옷 몇 벌이 다였을 정도로 심플했다. 그러니 장욱진의 이런 가치관을 몰랐다면, RM이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남길 수가 없다.
어쩌면 그가 달항아리를 좋아하는 것도 달항아리 특유의 담백함, 군더더기 없는 심플함에 매료되어서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는 도예가 권대섭의 집까지 직접 찾아가 수천만 원짜리 달항아리를 샀다. 또한 최근 미술품 경매에서 조선 백자를 낙찰받기도 했다.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고 최순우(1916~1984) 선생은 달항아리에 대해 "아무런 장식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 구워낸 담백함과 아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를 '잘생긴 며느리'에 비유했다. “잘생겼다는 말은 얄밉지 않다는 말도 되고 또 원만하고 너그럽다는 말도 되며 믿음직스럽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 백자 항아리의 아름다움 속에는 그런 아름다움의 요소들과 귀여운 며느리가 지니는 미덕이 함께 있는 셈이 된다.” 심성도 곱고 얼굴도 예쁜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긴 시선, 그것이 바로 달항아리를 바라보는 마음이라는 말이다.
최순우는 달항아리의 완벽하게 동그랗지 않고 어리숭한 모양새에 대해 "의젓한 곡선미"라 했지만, 나는 바라만보아도 마치 막걸리 한 잔 걸친 듯한 흥취가 일어나는 흥청거림과 풍만함의 곡선으로 느낀다. 아마도 순하고 어진 흰색, 사실은 엄마의 젖빛깔 같은 색이 뽀얗게 퍼져가기 때문일까.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Victoria & Albert) 왕립박물관의 베스 매킬롭(Beth McKillop) 전 부관장은 2018년에 쓴 글에서 "순백의 달항아리는 그 개성과 풍성한 매력으로 현대적 공간과도 잘 조화를 이룬다"며 "(달항아리의) 옅은 색조는 그것을 보는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달라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 정작 달항아리에 대한 RM의 생각은 어떠할까. RM은 2월 12일 팬들을 위해 'Curated for ARMY' 콘텐츠를 공개하면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공식 홈페이지에 '아미의 방' 이미지를 게재했다. 방탄소년단은 지난 11일부터 슈가를 시작으로 'Curated for ARMY'를 통해 팬들을 만나고 있다.
큐레이터로 나선 RM은 직접 꾸민 '아미의 방'에 대해 "(앞서) 'RM의 방'에 도자기가 있으면 좋을 거라고 했는데 '아미의 방'에 놓기 위해 아껴 뒀다"라고 자신의 방이 아닌 '아미의 방'에 달항아리를 놓은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모양이 모두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것처럼, 전 세계 아미도 '아미'라는 이름으로 방탄소년단 곁에 함께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달항아리가) 꼭 '아미의 방'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아미 여러분에게도 따뜻한 하루를 선물하고 싶은 제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달항아리에 대한 RM의 코멘트는 이러하다.
"달항아리는 왜 달항아리냐면 보면은 보름달처럼 생겼어요. 백자 흙을 가지고 구멍이 뚫려있는 윗쪽이랑 아래쪽을 접합시켜서 만든건데 그 사이에서 가마의 상태나 여러가지 여건에 따라서 둥그렇게 붙인 흔적이 생겨요. 생길 수가 있고 안 생길 수가 있고 그거는 도공분들이 조절하시는 건데 달항아리 딱보면 '달 떴다' 보름달이 딱 뜬 것처럼 이렇게 있는데. 진짜 귀여워요. 엄청 귀엽고... 저는 항상 청자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달항아리를 찾아보고 나서 '백자도 장난아니구나' 이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RM이 '아미의 방'에 놓은 또 다른 소품은 사방탁자다. 그는 "사방탁자는 사방이 뚫려 공간이 넓어 보여서 마음이 편안해진다"라며 "푸근한 느낌의 달항아리의 곡선, 사방탁자의 직선과 사각형 모양이 어우러져 아미 여러분에게 다채로운 편안함을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백자 만드는 아가씨, 박서희도 도자기에 매료된 계기가 달항아리였다. 굳이 '아가씨'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가 갓 20대를 지나친 젊은 여성인데도 백자를 만들고 있고, 그것도 아주 잘 만들기 때문이다.
백자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작업을 계속 어어가는 동력에 대해 박서희는 이렇게 말한다.
"백자 달항아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 매력적이고 유려한 곡선 때문에 재학 중엔 항아리만 만들 정도로 빠져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박물관에 가서 달항아리들을 구경했는데, 언제부턴가 주변의 다른 사물들도 점차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박물관에서 봤던 것들을 떠올리며 사발도 만들어보고 필통도 만들어보면서 작업의 스펙트럼을 넓혀온 것 같다."
내가 박서희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18년 코엑스에서 열린 '2018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였다. 당시 나는 <유럽 도자기 여행> 시리즈 동유럽, 북유럽, 서유럽 편 3권의 출간을 마친데 이어, 바로 <일본 도자기 여행> 시리즈 3권, 즉 '규슈의 7대 조선가마' '쿄토의 향기' '에도 산책'의 출간을 모두 마친 때였다. 바로 직전에 유럽에 이어 일본의 내노라하는 명장 도자기들을 모두 섭렵한 터였으므로, 내 안목은 높아져 있을대로 높아져 있었다. 따라서 주로 젊은 작가들이 나오는 공예트렌드페어에서 과연 내 눈을 만족시켜줄 작품이 있을까, 하는 반신반의 마음으로 전시회를 갔다.
내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찾을 수 있었을까? 예상과는 다르게 나는 그곳에서 괄목할만한 젊은 도예가 몇 명을 만날 수 있었다. 흡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장래 발전 가능성이 엿보이는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견했다. 바로 그 중의 한 명이 박서희였다. 비록 출품 제품도 그닥 많지 않았고, 완결성에 있어서도 약간의 미진함이 보였지만 단연코 눈에 뜨였고, 가능성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나는 어린 아가씨가 이런 제품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그런데 박서희는 이미 2016년 말에 '명인명장 한수(韓秀)'에 입점한, 촉망받는 루키였다.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과 신세계 DF, 그리고 ㈜디자인하우스가 함께하는 '명인명장 한수'는 이름 그대로 뺴어난 공예작가들의 작품만을 한데 모아 판매하는 일종의 플래그숍이다. 원래 남대문 MESA 빌딩에 있다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살림1관으로 옮겼다.
‘한수 가르쳐 주지’ 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한수(韓秀)는 ‘한국 명장들의 손’ ‘한국의 빼어난 수작’으로 명인의 한수를 젊은 세대에게 전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제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공예문화공간 '한수;는 한국 공예의 힘과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이고, 그곳에 초대받은 공예가는 어느 정도 수준을 인정받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20대의 젊은 아가씨가 그렇게 대표 공예가 대열에 들어섰다는 점도 놀라운데, 2017년에는 런던에서 열린 <Collect 2017>과 뮌헨에서 열린 <Handwerk Messe 2017>에도 참여해 글로벌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박서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디자인학부와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했다. 그러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신예 작가로서 주목을 끈 셈이다. 매우 이례적이다. 게다가 2020년에는 런던 사치 갤러리 (Saatchi Gallery)에서 전시회가 열렸고,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왕립 박물관에서 작품을 구매, 소장했다.
모든 공예품이 매 순간순간마다 지난한 공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만, 도자기는 좀 다르다. 다른 모든 공예품은 눈으로 과정을 확인하며 작업을 진행하지만, 도자기는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정말 '깜깜이' 상태의 과정을 지나쳐야 한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마무리 과정에서! 바로 불에 넣어 굽는 과정이다. 모든 도자기는 불 속에서 비로소 온전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1200도가 넘는 불 속에서 어떤 변이가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다. 그 과정은 미지의, 신의 영역이다.
따라서 모든 도예가는 가마에서 제품이 구워지는 그 과정을 잘 견뎌야 한다. 자신의 의도대로 작품이 만들어져 나온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결과물에 따라서는 극심한 실망과 스트레스를 받는다.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땀을 흘려 만든, 정말 자식과도 같은 물건이 마음 먹은대로 나오지 않았을 때, 그것을 망치로 깨트리는 심정을 일반인은 알 수 없다.
박서희는 이럴 때 어떤 마음으로 대처할까. 본심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답은 정말 쿨하다.
"이럴 때도 저럴 때도 있지 하고 그냥 넘겨요. 그 과정서 속상해하는 동료들이 많은데, 저는 그냥 툴툴 털고 넘겨요. 어차피 제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잖아요."
참, 도예가로서 바람직한 성격이다.
그럼 백자를 만드는 마음은 어떨까. 백자는 몇 mm의 차이로도 형태가 바뀌는 섬세한 물레작업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매끈하게 잘 빠진 선을 찾기까지, 손의 감각을 익히기 위해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겪는다. 박서희는 "제작에 들인 수고와 노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아주 정직한 사물이 백자"라고 말한다. 그 정성을 고객에게 전달해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도자 작업의 매력이라고 한다.
갤러리 도큐먼트는 올해 전시의 첫번째로 직접 박서희를 선정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230여 점의 작품들은 순도 높은 백색의 흙 위에 물과 나뭇잎을 연상시키는 푸른 빛깔의 유약을 입히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이다. 도자 표면을 들여다보면 마치 파란 안개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여 전시회 제목이 <미스트(mist)>다. 정갈한 백자와 어우러지는, 신비롭기까지 한 이런 푸른 안개의 일렁임은 작가가 다중의 겹으로 수차례 유약을 입히고 입히는 반복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 이 푸른 안개는 때로는 흐르는 강물이나 높은 하늘이 되기도 한다.
나는 방탄소년단의 RM처럼 우리 도자기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있고, 박서희처럼 백자를 잘 다루는 젊은 작가가 나타난 데서 희망의 불씨를 본다.
우리 도자문화 전체를 통채로 노략질해갔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닌 임진왜란과 이후의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고, 70~90년대 잠시 융성기를 거쳤지만 다시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우리 도자업계는 과연 찬연한 불꽃을 다시 피울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방탄소년단의 수많은 히트곡 중 하나인 <아이돌(IDOL)>의 후렴구로 기합이나 넣어야겠다.
덩기덕 덩기덕 쿵더러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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