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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Apr 15. 2019

나는 산유국이다

감정 자본주의 - 에바 일루즈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 수정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개념도 나오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되지만 모든 것이 결국은, 돈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21세기.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죽기까지 하는 살벌한 세상에 살면서 왜 돈이 '감정'까지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을까. 


치료 내러티브는 특화된 시장을 창출한다. 시청자는 잠재적 환자 겸 소비자로 정의된다. 치료학 관련 직업, 출판 산업, 텔레비전 토크쇼는 '너무 사랑하는 사람' 혹은 '옛사랑을 못 잊는 사람'들을 소비자 겸 환자로 구성한다. 


이제 자본은 오프라 윈프리 쇼처럼 개인의 감정을 내러티브화 해 수익을 창출한다. 정상의 범주였던 분노, 슬픔, 불안 등은 00 증후군, 00 콤플렉스라고 정의되는 치료 대상이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팔려나가고, 심리학 상담이라는 새로운 수익 모델이 창출된다. 제약회사, 보험회사 등은 정신질환의 범위를 확장해 또 다른 상품을 판매한다. 이런 현상들이 감정을 자본화한다는 저자의 발상이나 가부장적 권위주의 탈피나 페미니즘의 확산으로 심리학이 강조되면서 감정이 자본의 타깃이 됐다는 저자의 설명이 신선했다. 


한편 의문도 든다. 아동학대로 인한 왜곡된 인격 형성, 왕따를 당한 경험에서 비롯된 아픔, 부모나 이성친구로부터 학대받았던 상처들, 장남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했던 어마어마한 무게의 의무들. 여러 가지 정서적인 문제들을 심리학으로 치료하면 우리는 안정감을 되찾고, 과거보다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이 대중화되는 것은 감사한 일 아닐까. 예전에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바람 부는 벌판에서 시달리는 갈대처럼 흔들렸는데, 이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니 다행 아닌가. 서점에 범람하는 지나치게 많은 자기 계발서에 관해 저자가 너무 예민하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선택이 그러하듯,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를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상술에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들은 언제든 돈으로 구입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원칙은 역시 감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저자가 말했듯, 근면, 성실, 청결함 등은 쉽게 정신분석학에 의해 강박증으로 둔갑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둔갑술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자신을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때론, 슬픔이나 불안, 우울 등 어두운 감정들을 도저히 혼자서는 소화할 수 없을 때, 위로와 안정을 주는 심리학 책이나 자기 계발서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보다 쉽게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저 의심과 선택 사이에서 충분히 고민하고 적절하게 하나를 취사선택하면 된다.


그래도 어째, 입 한 구석이 씁쓸하다. 혼자서만 조용히 간직하고 싶은 옛 추억, 이제는 빛바랠 만큼 바래 덤덤해진 아픔, 다시는 꺼내보고 싶지 않은 독한 슬픔 등 다양한 색깔의 감정들이 있는데, 나만의 소중하고 은밀한 것들이 밑바닥까지 파헤쳐져 자본의 타깃이 된다니. 어쩐지 조금 서글퍼진다. 방학 때나 백수였을 당시 재미있게 보았던 아침마당도 알고 보니, 타인의 아픔을 상품화한 것이었고,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TV 앞에서 엉엉 울면서 내 시간과 감정을 자본에게 내주었던 거라니. 삭막하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도 적극적으로 내 감정을 팔아보자는 생각. 모든 것은 자원이고 자본이 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나는 보고 느끼고 잡아낸다. 풍족한 산유국이다. 이제 나는,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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