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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May 07. 2019

뻔한 서평이라도 굳이 쓰는 이유

인생의 베일 - 서머싯 몸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사랑에 속아 모든 것을 잃은 순진한 사람. 자신의 이기심에 눈이 팔려, 자신에게 진심을 다했던 상대방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잔인한 사람. 진실한 사람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지혜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랬던 그녀가 변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관심에 머리 숙여 감사할 줄 아는 겸손을 알게 된다. 뒤늦은 깨달음이었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해 담대함과 강건함으로 무장한다. 과거의 상처나 어리석음 따위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 질기고 꾸덕한 심장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이런 뻔한 서평. 지루하다. 뻔한 사랑 이야기에 뻔한 서평이라니. 벌써부터 하품이 나오려고 한다. 


그녀는 젊음 자체의 아름다움 이외에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사랑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어.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그래야 할 어떤 이유도 찾지 않았어. 내 자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니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 때 황홀했어. 나는 내 사랑으로 당신을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어.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내 애정에 참을성을 잃기 시작하는 징조가 보이는지 언제나 조심했어. 대부분의 남편들이 권리로 여기는 걸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남편을 버리고 그저 잠깐의 놀이 상대로 자신을 생각하는 파렴치한에게 속아 헌신적인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하다니.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또 중얼거리다니. 서점에 넘치고 남쳐나는, 누구나 다 아는, 사랑에 속고 속이고 눈물짓고 죽어버리는, 진부한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 칭송받는 작가들이 많지만 최고의 입담꾼은 역시 서머싯 몸이다.


여자의 심리를 어쩌면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한 줄 한 줄, 여성이라면 모두 한 번쯤 느끼고 경험해 봤을 묘사들.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할 수 없었던, 스스로를 경멸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 내 발등을 내 손으로 찍고 싶은 후회들.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으면 서술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단계별 여성의 심리를 마치 자신이 실제 겪은 일인 양 촘촘하게 엮어냈다. 게다가 수도원의 분위기나 죽어가는 중국인들, 바이러스와 밀림, 그 외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서머싯 몸의 글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의 활자들은 언제나 풍성하고 생생하다.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매력적인 소설로
완벽히 완성시키듯,
나의 지난하고
지루한 시간들을 
흠뻑 빠져드는 
멋진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 

언제나 완벽히 예상 가능한 나의 하루하루를 어제와 같은 뻔한 오늘로 만들지 않으려면.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만든다거나, 통통 튀거나 유쾌하거나 흡입력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집어넣거나, 아니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만들거나. 


신나는 일들이 뭐가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뻔하면 어때. 

뻔하더라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내 인생이 쌓이는 거니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리는 이야기가 아닌, 내 입으로 나오는 말들. 내가 생각하고 내가 겪은 시간들, 경험들, 순간들. 뻔하든, 뻔하지 않든, 모든 인생의 고비고비를 타인이 아닌 나의 몸으로 겪어내는 일은 어느 인생에서든 생략할 수 없는 필수 코스다. 누구나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니까 어차피 그게 그거니까 나는 생략하자, 그 대신 뻔하지 않은 다른 일을 하자, 이럴 순 없다.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모두 기어이 실패를 하니까 나는 사랑은 하지 않겠다, 이럴 순 없으니까. 뭐 해 보니 그런 건 다 필요 없더라, 어른들이 말해도, 쓸모없는 경험과 이야기라도 그 목소리가 내 것이라는 게 중요하다. 


그 판에 박히고 지극히 일상적인 나날 중에서도 특별한 나만의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을지. 사소한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에 내가 눈길을 줄지. 그것도 오로지 내 몫이고. 소란하고 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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