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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잔인한 손 1

프란시스 베이컨

by 이하진
francis-bacon-entretiens-avec-michel-archimbaud-o-2070329267-0.jpg <Francis Bacon: Entretien avec Michel Archimbaud>

<Francis Bacon: The Painter’s Brutal Gesture> Milan Kundera

<화가의 잔인한 제스처> 밀란 쿤데라


12-13p.

"그건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사랑을 노리고 있지는 않았다. 난 그녀의 얼굴에 잔인하게 손을 얹고 잠시라도 그녀를 완전하게 소유하고 싶었다. 그건 그녀가 갖고 있던 이율배반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나무랄 데 없는 옷차림과 요동치는 창자, 그녀의 이성과 그녀의 두려움, 그녀의 자부심과 그녀의 불행이라는 이율배반이 나를 자극하여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일게 했던 것이다.

...

화가의 시선은 잔인한 손처럼 얼굴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화가의 시선은 그 얼굴의 본질, 즉 그 내면 깊숙한 곳에 놓여 숨어 있는 다이아몬드를 소유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그 깊은 내면이 정말로 뭔가를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더라도 상관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잔인한 몸동작, 즉 손놀림이 있다. 타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타인의 가슴속에 혹은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내려는 손놀림이 말이다."


14-15p.

피카소(혹은 마티스)의 경우, 유희에 가까운 쾌감이 주도했다면, 베이컨의 경우에는 (비록 쇼크까지는 아닐지라도) 경악이 두드러진다. 특히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라는 문제를 표현할 때는 더욱 그렇다. 놀라움 내지는 경악에 사로잡힌 화가의 손은 '잔인한 제스처'를 취해가며 육체와 얼굴에 놓여진다. 얼굴 속에서 또 얼굴 뒤에서 그 안에 숨어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16p.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은 현상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변이의 의미를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난 내 나름의 방식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보겠다. 변형된 형태들은 서로 구분되지만 동시에 자기들끼리 공통된 그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 이 공통의 그 무엇이 바로 "보물, 금괴, 숨겨진 다이아몬드"이다.


18-19p.

나는 아솅보와의 대담을 읽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베케트의 작품에서 종종 그가 자신의 텍스트를 숫돌로 갈 듯이 말끔하게 다듬으려 했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작품은 울림이 없고 완벽한 공허만 남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27p.

베케트나 베이컨은 그들이 살아온 어떤 문명의 종말을 목격하더라도, 이 잔인한 최후의 대면은 사회나 국가나 정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신체적인 물질성과 연관되어 있다.


30-31p.

예를 들면, <인간 육체 연구>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이러한 점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인간의 육체가 완전히 우연임을 폭로한다. 인간의 육체는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다른 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

그의 그림에서 나를 '끔찍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아니 오로지 그 점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끔찍함'이 올바른 표현일까? 아니다. 이러한 그림들이 자아내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 그림들이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끔찍함'은 아니다. 즉 역사의 광기, 고문, 박해, 전쟁, 대량 학살, 고통 따위에 의해 야기되는 그런 '끔찍함'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 이건 다른 식의 '끔찍함'이다. 그것은 갑자기 화가가 드러내는 인간 육체의 우연성 때문에 생기는 그런 '끔찍함'이다.


-


<첫번째 대화>


57p.

베이컨 어떤 면에서 장식은 그림과 대립하죠. 정반대입니다.


65p.

베이컨 사람들이 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립니다.


69p.

베이컨 내가 본 모든 것들이 내게 영향을 미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카소 역시 모든 것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와도 같았지요. 이 점이 바로 내가 영향에 대해 말할 때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즉 스펀지가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지요.


106p.

아솅보 글쎄 그렇다면, 당신은 워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베이컨 당신도 알다시피 비록 그가 팝 아티스트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결코 예술을 만든 적이 없으며 그림을 만든 적도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


<두번째 대화>


117p.

베이컨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보는 어떤 것을 우리의 본능으로 어떻게 창조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

어쨌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본능이란 스스로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나의 방식대로, 절망적으로, 나는 나의 본능을 좇아 여기저기를 다닌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120-122p.

베이컨 유일하게 효과적인 비평이란 당신 자신일 뿐입니다. 즉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당신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두개의 자아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작업 중에 작동하는 비평적 감각이란 가능한 한 최상의 마지막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캔버스 위에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당신이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무엇이 가능한지를 발견하는 기능입니다.

...

나는 모든 예술가들이 주변 상황에 적응하고, 그만의 독특한 유산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가 속한 시대의 어느 한 시점에 놓여 있다고 확신합니다. 마치 그가 똑같은 못을 끊임없이 두드리기 위해 그의 모든 솜씨를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고 시를 읽거나, 혹은 음악을 듣는 일 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거나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서 말입니다.


125-127p.

베이컨 예술가에게 계속 반복되는 유일한 문제는, 항상 똑같은 변하지 않는 주제를 매번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찾아서 표현하는 일입니다.

...

만일 당신이 당신의 본능에 가능한 한 가까이 근접해서 무언가를 했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참으로 예외적인 일에 속합니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죠.

...

아마도 1946년에 제작된 <회화>의 첫번째 판에서. 나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새 한마리가 날고 있는 들판을 만들고 싶었지요. 캔버스 위에 한 무더기의 참고 자국들을 찍어 놓았는데, 그러자 갑자기 당신이 지금 그 캔버스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형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그것들이 나를 압도해버렸지요. 그건 내가 애당초 계획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지요. 그렇게 일이 벌어졌을 뿐, 나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고 꽤 놀라워했지요. 이 경우엔 본능이 그러한 형태들을 연출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영감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건 뮤즈라든가, 혹은 그 비슷한 어떤 것들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아니지요. 그건 정말 하나의 사건처럼 예기치 않게 일어났지요. 나는 한 가지 일에 착수했는데, 완전히 당혹스러운 방법으로 그것과는 아주 다른 어떤 일이 벌어졌지요.그것은 우연적이며 또한 동시에 매우 명백한 일입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본능이지요.


Screenshot 2025-07-28 at 4.58.35 PM.png Francis Bacon <Painting> 1946

<프란시스 베이컨: 화가의 잔인한 손> 대담자 미셸 아솅보, 옮긴이 최영미, 도서출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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