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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Sep 10. 2015

끌어안고 살아가기

잊는 것도 내 삶이 되어 간다

웬일인지 오늘은 버스에 사람이 드물다. 지하철 역 입구에 바글거리며 몸싸움을 하던 인파들도 어디 갔는지 여유롭게 짝다리를 짚고 선 학생 몇 명만이 휴대폰 게임에 빠져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어깨에 내려 앉는 피로감. 운전하는 수고로움은 없어졌고, 창 밖을 내다보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출퇴근 비용까지 따지자면야 대중교통만 이용하는 게 좋겠지만 역시, 환승주차장까지 자가용을 몰고 다니던 때보다 훨씬 노곤한 퇴근길이다. 이게 다 그 노무 건망증 때문이다.


새벽 내내 끙끙 앓아 제대로 잠을 못 잔 아이와 아내를 아침 일찍 병원에 데려다 준 날이었다. 상사에게는 양해를 구했지만 그래도 너무 늦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아내와 아이를 내려주고 서둘러 차를 몰아 지하철역에 다다랐을 즈음, 나는 오른쪽 바지 주머니가 비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마도 내 휴대폰은 침대 머리 맡에 누워 열심히 몸을 떨고 있으리라.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체념한 남자가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옆 사람 휴대폰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어느 순간, 갑자기 심장이 벌컥 내려 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오늘은 사진 촬영 스케줄을 잡아 놓은 날이다. 그런데 내 어깨에는 사진기가 없다. 가져가겠다고 전날 밤에 애써 되새겼건만 아침이 되자 또 다시 새 마음 새 뜻으로 새카맣게 잊어버린게 분명하다.하지만 이 역시, 지금에 와서 사진기를 어떻게 구해본다는 건 무리였다. 처참하게도 지하철 안에 갇혀 있는 내게는 휴대폰이 없었다.


'연타석 안타'를 얻어 맞아 정신이 혼미해져 사무실에 들어섰다. 부장에게 출근했다는 인사를 하니 대뜸 "했냐?"라고 물으신다. 어, 오늘 아침까지 해야 할 일이 뭐 있었던가. 순간 확 달아오르는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어떤 거 말씀이세요?"라고 묻자 부장은 "주차장"이라고 말했다. 아, 맞네... 오늘이 벌써 그 날이었나. 부장은 나와 같은 환승주차장을 매월 이용하고 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보통 우리 동네 환승주차장 정기권은 오전 10시면 대기 순번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어떻게, 지금이라도 대기 순번 등록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서둘러 내 자리로 돌아와 PC 전원을 눌렀다.


발에 뭔가가 툭, 걸렸다. 급해 죽겠는데 뭐야 이건. 발치에는 사진기 가방이 비딱하게 넘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녀석의 등장에 잠시 몸이 굳었다. '누가 갖다 놨지?' 누구긴 누구야, 나지. 며칠 전 사진기를 미리 사무실에 갖다 놓았던 기억이 살아났다.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나는, 내가 사무실로 사진기를 들고 갔던 것 자체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은 좀 너무하긴 했다. 그 모든 것이 아침 몇 시간 안에 '터졌다'는 게 짓궂다 못해 잔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런 징조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건망증의 습격을 받은 것은 사실 아니다. 요 몇 년, 아니 최근 1~2년 사이에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뭔가를 '흘리고' 다니는 일이 종종 생기곤 했다. '흘리는' 대상도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실컷 사고 주차장까지 카트를 끌고 와서는 아이만 차에 태우고 그냥 출발했다가 집 앞에서 다시 마트로 돌아가는 일이 있질 않은가하면, 코털 정리기가 없어져서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매다가 주말에 겨울 옷을 넣어 둔 옷장 속에서 발견한 적도 있었다. (놓여 있던 높이로 보건대 3살짜리 우리 아이가 이토록 높이 점프했을 리는 없었고, 아내는 내 코털 정리기에 손이 닿는 걸 매우 꺼려한다) 술이 많이 들어간 날을 제외하고 맨 정신에 지갑을 놓고 다니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건만, 퇴근할 무렵 갑자기 지갑이 없어진 걸 깨닫고 몇 시간 동안 오늘 나의 행적을 내가 추적하고 다녔던 '새로운 경험'도 하게 됐다. (지갑은 결국 점심 먹은 식당 카운터에서 찾았다) 퇴근할 때 출발한다고 문자 한 통 보내 달라는 아내의 요청은 거의 매일 잊어버려서 이젠 아내의 핀잔을 '감상'하는 수준인데다, 주말에 신발들 좀 세탁소에  맡겨야겠다고 금요일마다 다짐한 것이 벌써 석 달이 다 되어간다.


'세상에  쓸데없는 일은 없고, 모든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태 살면서 종교는 없지만 이 문구 하나만큼은 믿고 다녔다. 그래서 건망증이 심해진 것도 뭔가 긍정적인 부분이 있으리라, 전혀 엉뚱한 좋은 점도 생겨나리라, 열심히 찾아봤다. 하지만 '결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건망증이 심해져서 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건 정말이지 흡연만큼이나 없다. 모르긴 해도 나이가 들수록 건망증이라는 녀석은 더 커질 텐데, 기억하지 못해 급하게 빈 공간과 시간을 메워야 하는 내 몸과 지식은 점점 더 쇠락해갈 것이다. 자연이 정한 반비례 관계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서글퍼하고, 애를 쓰고, 때로는 좌절하는 과정은 그 누구에게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밖에 없다.


다만, 방향을 조금 바꿔보면 건망증의 '2차 성징'을 꼭 그리 '악의 축'으로만 봐야 하는가 싶은 생각도 든다. 좋고 나쁘고의 이분법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중에 하나로, 의도적으로 작게 축소시켜 바라보는 것이다. 내 안의 건망증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도 내가 정상적으로 늙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노화'라는 게 단순히 신체가 무너져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상적으로 '늙고 있다'는 말은 내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정확히 알아간다는 얘기도 된다. 내가 아버지를 무척 많이 닮았다는 것, 내 생각보다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 웃고 떠들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혼자 조용히 앉아 공상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결혼 전에 장담했던 것보다 가정적인 남편 상은 아니라는 것. 어릴 적에는 이 중 어느 하나도 '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 살 두 살 나이가 차오르면서 나는 하나씩 느릿하게 받아들였다. 그 중에는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뼈아픈 것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뭐라든 나에 대해 관찰하면서 알게 된 '팩트'는 거역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 수록 더 아프게 나를 파고들 것이다. 부정하면서 소비할 에너지도 어마어마한데다 그 속에서 맺히는 스트레스와 자괴감도 고통스럽다. 굳이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가며 바꿀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도 사실 얼마 전에 인정했다. 어른들이 얘기하던 '안고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깨달음이 얼굴에 잡히는 주름과 함께 아주 천천히, 하나씩 늘어가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아직은 한적한 동네라 버스 정류장 근처에는 저녁 운동을 나온 몇몇 가족들과 풀벌레들만이 소리로 밤 공기를 채우고 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게 피곤하기는 해도 자가용을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로 바로 들어서는 것보다 "이거 하나만큼은 좋지"라며 연기를 후우, 뿜어냈다. 알고 있다, 이게 나한테 하고 있는 거짓말이라는 것. 건망증 '연쇄 폭발'로 불편해진 출퇴근길을 이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이 조금, 유치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렇게 가끔 말도 안되게 잊어버리는 것도, 수습하려고 애쓰다 짜증내는 것도, 이제는  끌어안고 가야 할 내 모습인걸.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느 새 잊는 것도 내 삶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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