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고 다시 보자
한 낮의 더위가 지면서 공원에는 사람이 찾아든다. 한참을 벤치에 앉아있던 나도 그늘의 양이 늘어난 길을 따라 걷는다. 공원 어귀에서 봤던 고양이는 어느새 정자 밑으로 자리를 옮겨 누워있다. 더 나은 그늘을 찾아 떠나다니, 지혜로운 털복숭이 같으니라고. 귀여운 얼굴에 유연한 몸짓을 구사하지만 사람 손길에는 날랜 다리로 자리를 떠난다. 괜히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조금 멀리 떨어져서 걷는다.
짝지어 오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가족도 있고 연인도 있고 친구도 있다. 그들을 유심히 살피며 어떤 이야기가 녹아있을지 생각한다. 우다다 뛰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 두 손 꼭 잡고 자주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 연인의 사랑스러움. 조금 떨어져서 걷는 친구의 뒤를 따라가며 한참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그들이 만들어내는 온기에 친구들을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인분의 몫을 하기 위해서 저마다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함께 공부하고 놀고 웃던 시간이 척박한 현실에 묻힐 만큼 꽤 긴 시간이었다. 나는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일을 시작했다. 오랜 꿈이었던 시인의 길이 나 하나조차 먹여 살릴 수조차 없다는 사실에 학기를 마치기 전에 입사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공부하느라 지친 친구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사줄 수 있어서 좋았다. 회사 생활에 익숙해질 쯤 친구들은 하나둘씩 부산을 떠났다. 더 좋은 곳에서 일하기 위해서,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서. 낯선 곳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은 듯 했다. 모든 것이 힘들다는 짧은 문자와 아무 말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마음을 졸였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움이 무심해질 쯤 연락도 줄어갔고 원망스러웠지만 그 마음의 감각도 점차 사라졌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지 않은 나는 친구들이 남기고 간 기억을 보관하는 사람 같았다. 혹시라도 다시 만난다면 손 때 묻은 기억을 건네 줘야지. 그러면 언제라도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학교와 회사 밖에서 친구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취미 속에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여름에 만난 친구들은 그 계절처럼 밝고 맑았다. 함께 공원을 걷고 지나가는 고양이 사진을 찍고 맛집을 가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다녔다. 새로운 사람이 주는 즐거움이 낯설었다. 예전 친구들이 궁금했지만 잘 지내고 있으려니 생각했다.
퇴사를 앞두고 몸과 마음이 너덜거려 출근길이 버거울 정도였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정말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지만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돌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저 산과 바다를 다녔다. 나무 사이를 걷고 바다를 보고 가끔은 성당이나 절에 가서 가만히 앉아있기도 했다. 가만히 놔두면 흘러갈 일들이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일상을 회복하면서 갑작스러운 친구들의 연락이 왔다. 잘 지내느냐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 10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고. 그리고 보고 싶다고. 오래 가슴 속에 남았던 원망은 어디로 가고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여전한 얼굴. 여전한 기억. 추억을 품은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음을. 기억의 조각을 안고 웃는 얼굴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서로의 소식을 묻지 않는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흔적으로만 남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지금은 어때, 괜찮니, 또 보자. 나도 이제는 괜찮다고. 누군가를 돌아볼 수 있을 만큼 나를 챙겼다고. 그러니 어느 순간 다시 멀어지더라도 잊지말고 다시 보자고. 아주 오래 전에는 함께 있어도 홀로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들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혼자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
짝지어 공원을 찾은 사람들에게서 나를 본다. 내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을 생각한다. 홀로 있을 때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함께 있을 때는 온전히 혼자인 순간을 찾는다. 그 굴레가 피곤하지만 혼자와 혼자 아님의 균형을 잘 맞추기 위함이다. 공원의 많은 얼굴들에 배인 색색의 이야기들이 나에게로 왔다가 다시 그들에게로 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