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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선샤인 Mar 26. 2022

두근거리는 삶을 살고 있나요

워킹맘에게도 영혼의 갈증을 채워줄 무엇인가 필요하다

영화와 음악, 공연을 좋아한다. 내가 전생이라고 부르는 결혼 전에는 자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문화생활을 즐겼다. 주말마다 뮤지컬과 연극을 예매하고 영양제 섭취하듯 보러 다녔다. 봄, 가을마다 야외 음악 페스티벌을 예약해서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극장에 걸리는 최신영화는 공표영화 빼고는 웬만한 건 다 봤다. 주말은 늘 다이내믹했다. 새로운 즐거움들이 풍선의 헬륨가스처럼 가득 차올라 붕붕 뜬 기분으로 살게 했다. 주말이 기다려졌다. 이번 주말에는 어떤 경험을 할까, 어떤 감정을 새롭게 느낄까 두근두근했다.      



결혼과 육아로 더 이상 주말에 두근거리지 않았다. 껌딱지처럼 내게 줄기차게 달라붙는 두 아이를 떼어놓고 외출 한번 하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영화 한 편이라도 보려 하면 남편에게 일주일 전에 먼저 양해를 구하고 몇 시간 동안 두 아이 눈치를 보다가 낮잠시간에 몰래 후다닥 도망쳐 나와야 했다. 그렇게 나온 후에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다. 해야 할 의무를 져버리고 나온 듯 마음이 추를 매단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혼자 내 영혼을 탐색할 시간을 중히 여기는 나였다. 혼자만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 자유롭게 문화와 예술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던 나. 육아는 내가 추구하는 자유와 대립해 점점 나를 죄어왔다.       



올해 워킹 맘이 되었다. 5년간의 육아휴직도 또 다른 세계였는데 워킹 맘이 되고 나니 세 번째 세계를 시작한 기분이다. 육아만 해도 힘에 겨웠는데 이에 더해 일까지 하려니 마음까지 쪼그라드는 것 같다. 지난 2년간 5시 일어나 혼자 독서하는 시간을 사랑했는데, 지난주에는 아이를 재우며 8시에 잠들고는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다. 몸이 굵고 늙은 고목이 된 듯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아이들 아침을 차려주고 등원 준비시키고 40분을 운전해서 4시간 동안 서서 수업하고 틈틈이 업무처리하고 5시에 돌아와 아이들 저녁 차리고 씻기고... 그리고 눕자마자 기절해버리는 일상. 세상 워킹 맘들이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살았다니 그들의 영혼이 온전하게 남아있기는 할는지 새삼 서글프다.     



메말라가는 내 영혼에 단비 같은 감성이 필요했다. 내 영혼이 갈망하는 문화생활. 온전히 예술과 음악에 흠뻑 젖어드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내게는 피아노가 있었다. 작년에 다시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 마음이 가냘퍼질 때마다 집 근처 피아노 연습실에 잠입했다. 한 평도 안 되는 그 공간, 온전히 피아노와 나와 음악만이 존재하는 그곳에 자리를 잡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천천히 건반을 눌러 피아노 소리가 방안에 퍼지면, 내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 같은 에너지가 생겨난다. 어떻게 이런 화음을 만들었을까. 예상치 못한 변주에 마음이 홀린다. 마음을 달래는 듯 부드럽게 흐르다가 불협 화음 같은 색다른 전개에 가슴이 뛴다. 부드럽게 때로는 불안하게 그러다가 다시 안정을 찾는 변화무쌍한 음악의 세계에서 나는 쉴 수 있다. 엄마로서, 교사로서 두꺼운 가면을 내려놓고 맨살의 내가 되는 기분이 좋다. 짧고 주름진 손가락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연주한다. 그 손놀림들은 나를 향한 응원이자 무너지지 말자는 약속이며 침잠하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짧은 일탈이다.               



검은색 악보집이 제법 팡팡해졌다. 연주할 수 있는 곡이 한곡 두곡 늘어날 때마다 다양한 경험에 도전하고 성공한 듯 뿌듯해짐을 느낀다. 이렇게 연습하면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30대 내 삶에서 이젠 성취감을 느낄 기회가 거의 없는데 피아노를 배우며 이런 성취감과 자존감을 배운다. 나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나만이 내 영혼을 배부르게 할 수 있다고. 오직 나만이 내 삶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새긴다.     



목요일 4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한다. 이 한 시간은 일주일 중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다. 첫째 하원 전 호수 공원 앞 피아노 연습실을 찾는다. 새벽이나 밤 아니면 연습할 시간도 사치인 요즘. 이 시간만큼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시간만큼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감정에 집중한다. 깊은 건반의 울림에 귀 기울여 내 영혼이 안녕한지 문을 두드린다. 작곡가 ‘리스트’는 손이 유난히 길었다고 한다. ‘도’에서 ‘파’까지 닿았다니. ‘도’에서 ‘도’도 겨우 겨우 닿는 내 손가락으로 그의 선율을 따라가기 벅차지만 그 모든 도전이 즐겁고 설렌다. 한 번에 손가락이 닿지 않으면 빨리 점프해서 손을 움직이면 된다. 안되면 연습하면 다 된다. 그 간단한 인생의 논리를 알기에. 오늘도 나는 즐겁게 건반 위에서 영혼을 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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