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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Feb 15. 2022

서른 증후군

빌어먹을 서른, 별것도 아닌데 자꾸 사람 속을 긁는다

무언가에 관심 없다고 말하는 이는 그 대상에 미친 사람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 내가 꼭 그런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서른, 서른이라는 단어에 미쳐 살았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서른 즈음에>, <서른 살, 비트코인으로 퇴사합니다>… 여하튼 ‘서른’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이면 뭐든 쉽게 마음을 쏟곤 했다. 나는 서른에 무관심하다 말하며 서른에 매몰되어 있었다.

미디어가 주입한 서른의 공포 때문이었을까. 서른이 된다고 해서 고작 며칠 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데 괜히 싱숭생숭했다. 몸이 아프면 괜히 세포의 노화 때문인 것만 같고 누군가 나이를 가지고 개그를 하면 나 혼자 찔리는 그런 느낌. 어떤 노랫말처럼 ‘아무렇지 않지 않지 않은 않은’ 마음이랄까. 빌어먹을 서른, 이게 별것도 아닌데 자꾸 사람 속을 긁는다.


서른을 기점으로 분명하게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지인들과의 대화 소재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회사의 부당함을 토로하곤 했던 사회초년생 시절이 고작 얼마 전이었던 거 같은데. 회사에서 제 몫을 하는 것에 급급하던 그들 중 몇몇은 이제 젊은 팀장이 됐다. 그러다 보니 자신과 함께 일하는 팀원이 당최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요즘 애들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하소연하기 시작한다. 아직도 회사에서 내 일 하나 건사하기 급급한 나는 자신의 업무에 더해 동료의 성과와 회사의 매출까지 고민해야 하는 젊은 팀장들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얼마 전 극장에서 <스파이더맨>을 보고 나오던 길에도 그들을 생각했다. 선배들이 히어로를 닮았다는 건 아니고 영화 속 명대사가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싶어서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는 거면, 큰(높은) 연봉에는 큰 책임이 따르려나?’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뭐하세요?’라고 물을 때면 늦은 시간에도 늘 회사에 있거나 주말 이틀 중 하루를 전부 업무에 할애하던 선배가 단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큰 책임을 진데도 높은 연봉이 보장되지 않은 회사가 많다는데, 연봉협상 후에도 가열차게 일하는 걸 보면 다행히도 선배는 책임지던 무게만큼의 연봉을 쟁취한 모양이다.


여러 회사를 오가며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연봉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15년의 짬으로 오류 없는 기계처럼 일을 해치우던 부장. 팀원들의 답답한 모습을 참지 못하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던 팀장. 물론 자신이 저지른 실수까지도 은근슬쩍 팀원의 실수로 포장하는 탈출 고수형 팀장도 있었지만. (얼마 안 돼서 그 태극권 고수형 팀장이 사실상 좌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나 큰 책임 없이 높은 연봉을 받는 건 백두혈통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애매한 나이만큼이나 애매한 연봉을 받던 과거의 나는 옆자리에 앉은 또래의 사수와 이따금씩 이런 얘기를 하며 시시덕거리곤 했다.


“선배, 팀장 자리라는 거 너무 힘들어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저는 팀장 되면 무서울 거 같아요. 평생 사원 대리만 했으면 좋겠다니까요.”


서른을 기점으로 달라진 게 하나 더 있다면 그건 책임에 대한 어떤 마음가짐이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서른이 온 것처럼 나도 언제까지나 사원 대리일 수만은 없으니까. 언젠가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만큼의 연봉 혹은 직급을 맞닥뜨리게 될 테니.


문득 옛 팀장님이 내게 했던 말을 곱씹어 본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저는 책임지라고 파주씨보다 회사에서 돈을 더 많이 주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때는 몰랐다. 그게 충분히 멋지고 자비로운 어른만이 꺼낼 수 있는 말이라는 걸. 새삼 직장에서 꾸준히 밥벌이를 하려면 지금 같은 속도로 내달려서는 안 된다는 부담감이 밀려온다. 아직 사원 대리를 벗어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일까. 이미 멀찍이 지나온 서른을 체감하지 못한 것일까. 다들 헤르미온느처럼 부지런히 살아가는 이 반도에서, 나 혼자만 제 나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처럼 느껴졌다.

괜스레 센치한 마음이 되어 냅다 <서른 즈음에>를 틀었다. 뻔하고 주책맞은 선곡이었다. 서른 즈음이라면서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를 내뱉다니. 고작 서른 주제에 곧 죽을 사람처럼 구는 가사가 부담스러워서 이내 소리를 줄였다. 솔직히 내 서른의 무게가 이 정도까지 무겁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모든 사람의 서른이 같을 순 없겠지. 덜떨어진 어른처럼 보여도 좋으니 아주 당분간은 죄책감 없이 조금 가벼운 서른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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