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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Mar 13. 2022

오늘부로 때려칩니다, 슬럼프

인간이 가장 졸렬해 보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칼럼계의 아이유 김영민 교수는 ‘무능한데 욕심은 많을 때’ 인간이 졸렬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자신의 음식도 다 먹지 못하면서 타인의 것을 탐하거나 직장 상사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약자에게 해소할 때. 그럴 때 인간이 가장 졸렬한 존재가 된다고.


며칠 전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어떤 순간에 인간은 가장 한심한 모습이 될까. 남이 끓인 라면을 탐내며 한입만 달라고 구걸할 때? 다이어트를 결심한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 족발 대자를 주문할 때? 우스운 상상을 하다가 이내 정답지에 가까운 장면을 떠올렸다. 그건 아마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 정확히 지금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한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은 했는데 정작 성과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책상에 눌러앉아 무언가를 붙들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퇴근하는 순간 뒤를 돌아보면 그날의 업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성실하게 정권을 내질렀지만 주먹에 느껴지는 감각 하나 없는 허탈한 기분. 매일 비장한 마음으로 출근해도 무력함만을 가득 채운 채 회색 전철 속으로 터덜터덜 퇴근했다.


지인들을 만날 때면 늘 괴로웠다. 근황을 전하려면 내가 느끼는 허탈함과 나의 무능을 가감 없이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의 무참한 현실을 슬럼프나 일태기라는 말로 포장해 주었지만 사실 능력 부족에 가까웠다. 슬럼프라는 건 자고로 평소에 제 몫을 너끈히 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말하니까. 그런 근사한 말로 나의 처참한 꼬라지를 포장하기에는 그 단어가 너무 과분하게 느껴졌다. 분명한 건 나는 밥값 하지 못하는 열등 직장인이었다는 거다.


패배감에 익숙해지는 것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의 디딜 곳을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일꾼으로 살기 실패한 날이면, 이미 망한 하루를 되돌릴 수 없으니 타인의 성공을 보며 허튼 배를 불렸다. 프로 축구선수의 멋진 골 장면으로 시동을 건 지옥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주인공이 별 계기도 없이 각성하고 말도 안 되게 강해지는 소년만화로 나를 끌고 갔다.


어제의 꼴통이 오늘 갑자기 에이스가 된다는 만화의 스토리.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염없이 부러워하며 그렇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했다. 그 기간 동안 무시로 찾아오는 자기연민까지도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이건 그저 나의 무능일 뿐인데 갑작스런 부진이나 환경의 탓으로 변명하기가 비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무너지니 덩달아 건강까지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불면은 만성피로를 불렀고 만성피로는 가뜩이나 회전력이 느려진 전두엽의 속도를 더 더디게 만들었다. 무능한 인간의 남은 쓸모마저 말살되는 과정. 그렇게 나는 스스로 끝도 없이 침잠했다.


무능의 굴에서 몇 달 동안 허덕이던 내게 떨어진 동아줄은 과거 나에게 발신된 글이었다. 스스로에게 썼던 일기부터 누군가 내게 보낸 편지와 카톡, 풀칠으로 보내진 품앗이들까지. 특히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따숩게 남긴 말들이 듬직한 사슬이 되어 나를 굴 위로 끌어당겼다.


따지고 보면 그랬다. 한동안 멘탈이 무너진 건 비단 일의 성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무기력함을 더하는 데에 강력한 빌런처럼 굴었다. 특히나 나를 향한 응원을 방어하려는 비겁한 스탠스가 이 사단을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스스로를 자조하며 웃기는 부류의 인간인 나는 칭찬에 취약했다. 정말이지 칭찬 노이로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나이 먹도록 도대체가 남들이 건넨 달콤한 말 한마디를 어떻게 삼켜야 하는지조차 익히지 못했다.


다가오는 호의의 말을 향해 겨우 ‘아닙니다’를 반복하던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건 곧 타인의 배려나 노고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무례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칭찬을 방어하는 동안 나는 딱 그 정도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 나에게 준 칭찬을 내가 제때 받지 않으면 그건 수취인 불명의 쓰레기가 되고 말 텐데. 그건 나에게도, 남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3월의 어느 주말, 나를 향했던 과거의 말들을 마음속에 눌러 담으며 슬럼프 비슷한 것에서 탈출한 기분을 만끽했다. 오래 머물렀던 굴에서 탈출해 낯선 햇빛을 기쁘게 바라보는 자연인의 기분. 머리 속을 뒤덮은 뿌연 안개가 휙 하고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 난생 겪어 보지도 않았던 순간을 난데없이 경험했다.


이날을 기념하며 나의 구원자이기도 했던 일기장에 몇 줄을 끄적거렸다. 기억에 남는 몇 개의 칭찬과 함께 다짐 비슷한 것도 적어두었다. ‘별말씀을요’, ‘아니에요’ 대신에 ‘감사하다’, ‘그럼요’ 같은 말들로 칭찬을 환대하기. 일종의 칭찬 노이로제 극복법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칭찬받을 일이 드물고 귀하니까. 조만간 누군가 나에게 칭찬을 건넨다면 무지막지하게 기뻐하며 받아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칭찬을 건네주는 사람의 노력이 무용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따수운 말들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나’라는 인간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가기로 했다. 이것이 내가 무능의 굴에서 얻은 슬럼프 공략법이자 ‘직장인 파주’가 배운 새로운 생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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