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을 꿨다. 10대 녀석들이 내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 나가라고 해도 자리를 차지하는 꿈이었다. 경찰에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놔도 속수무책이었다. 너무 싫었다. 그 이상으로 기분을 수식할 기운이 없을 만큼. 언뜻 깨어나 눈을 떴다. 호텔 방이었다. 옆에 있는 과수의 손목을 잡았다. 나 악몽을 꿨어.
아침 8시 30분, 리조트 프로그램 중 하나인 요가를 했다. 오랜만에 요가를 하니 동네 생각이 났다. 리조트 요가는 모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낮은 게 특징이다. 그렇지만 너무 루즈했는걸. 물론 그 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는 가기 귀찮기만 했던 요가가 여행 중에는 그리운 일 중 하나라니. 인생 도대체 뭘까.
요가를 끝내고 조식을 먹는데 대기 중인 사람이 많았다. 살면서 조식 대기를 이렇게 오래 하는 건 처음이군. 듣던 대로 밴프 페어몬트 호텔이 조금 더 먹을 게 많았다. 특히 저 감자튀김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바삭함을 갖추고 있어 좋았다. 에그 베네딕트는 빵과 햄이 그다지 맛이 없어서 뭔가 아쉬운 맛. 팬케이크는 괜찮았다. 잼과 콩포트가 뭐가 다른 걸까 싶었는데 과수는 알 것 같았다. 물어보니 과연 과수는 알고 있었다. 역시 무과수 최고!
오늘은 날이 영하 33도까지 떨어지는 날이다. 으레 묻는 How are you? 에 대부분 Cold라 대답한다. 어쩐지 더 화창해 보여서 산책 욕심이 났다. 이따 점심에 나가봐야겠군.
페어몬트 밴프 스프링스는 고성처럼 생겼다. 무도회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홀에 이렇게 거대한 트리가 있었다.
사진 찍자고 하는 이연과 도망치는 무과수를 닮았다.
호텔 레지던스에 소속된 예술가. 본인처럼 부드러운 그림을 그린다. 냄새가 안 나는 기름을 사용한다고 했다. 나는 스케치를 주로 한다고 하니까 그도 스케치가 모든 그림의 기본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연필선을 보여줬다. 그 단순한 대답이 어찌나 위로가 되는지.
친구와 여행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적재적소에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이다. 어제 종일 함께했던 터라 오늘은 따로 활동하기로 했다. 나는 찍고 싶은 사진들이 있어서 밖으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보우 폭포.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진다. 겨울 캐나다는 한적해서 어딜 가도 사람이 없거나 두 명 정도가 끝이다. 폭포도 실컷 전세 낸 듯 구경할 수 있었으나 기온이 영하 -30도였다는 점. 걸음을 옮겼다.
서프라이즈 코너 뷰 포인트에 가는 중. 길이 소박하고 예뻤다. 종종 미끄러웠으나 아이젠을 차고 걷기에는 먼 길이었다. 조심조심 걸었다.
뷰 포인트 도착. 스프링스 호텔을 감싸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이번 호텔은 짙고 웅장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돌아가는 길에 찍은 셀카... 분명 몸은 안 추웠지만 머리카락과 목도리는 추워하는 상황. 앞으로 영하 20도에서는 머리카락이 안 드러나게 비니를 쓰고 다녀야겠다는 다짐. 추울 때는 안경에 김이 너무 많이 서려서 그냥 벗고 다닌다.
숙소로 돌아와서 몸을 데울 겸 쉬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 장면을 마침 그리고 싶었지. 다 그리고 무척 흡족했다.
저녁은 M1층에 있는 레스토랑. 뭔가 멋있게 생긴 바텐더가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셔츠 입고 칵테일 만드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무척 섹시하다.
바텐더의 추천을 받아 주문한 첫 번째 칵테일. 헤네시 코냑이 들어갔다. 배 향이 나고, 같이 곁들일 배 칩도 함께 꽂혀있다. 맛은 내가 이제껏 마셔본 칵테일 중 제일 맛있었다. 부드러운 코냑 마시는 느낌. 잔도 예쁘다. 금도 들어있다...
처음에 먹은 음식은 오늘의 수프였다. 베이컨이 들어간 포테이토 수프. 이름만큼 보장된 맛이었다. 집에서 만들어보고 싶네.
가격은 96달러인데 사이즈는 작은 와규. 양이 딱 맞아서 오히려 좋았다. 옆에 있는 흰 덩어리는 버터인데 캐러멜 라이즈 한 양파와 함께 섞은 것 같았다. 일반 버터보다 더 풍미 있게 녹아드는 맛. 스테이크와 함께 먹으니 최고였다. 이렇게 연식당 메뉴 개발 들어갑니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맛있게 먹었다. 곁들임 메뉴 없이도 이렇게 깔끔하고 완성도 있는 한 접시라니.
칵테일을 한 잔만 더 마시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 또 한 잔을 시켰다. 메이커스 마크와 시나몬, 그리고 기타 재료를 섞어 만든 칵테일이었다. 시나몬 향 덕분인가. 크리스마스 같은 맛이 났다. 호두는 메이플 시럽에 절인 호두.
칵테일만 먹기 애매해서 안주 겸 작은 푸드를 시켰다. 추천받은 메뉴는 머시룸 타르트. 저 갈색 소스가 엄청 진한 버섯 소스인데 집에서 꼭 만들어보고 싶다. 디저트 메뉴가 너무 달아 보여서 시킨 메뉴였는데 성공적.
4박 5일에 걸친 페어몬트 호텔 나들이가 끝나간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일찍 잠들 예정이다. 내일도 재밌게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