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할 것을 알고도 시작하는 것
아빠가 죽고 나서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남겨진 자의 삶을 흔든다. 무너진 삶을 수습하는 시간에 밀려 애도는 사치가 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강진 앞에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일상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해야만 하는 것들을 꾸역꾸역 했다. 어떤 것은 내가 노력한다고 할 수 없었고, 나는 내가 거리를 둔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며 종종 패배감에 빠졌다. 내가 모든 일에 서툰 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인가, 상주도 서지 못하는 여성이었기 때문인가, 야무지고 빠릿빠릿하지 못한 내 성격 때문인가.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내 본질적인 정체성에 대해 좌절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지만 자기 비하를 멈추지 못했다. '고작 나는 이 정도의 어른이 되었구나.'
이런 일에 능숙하지 않다고 해서 아무도 나를 욕하지 않는데도, 나는 '어른다움'에 대한 강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장녀라면 마땅히 큰 일도 잘 대처하고 모든 과정을 능숙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부담감에 짓눌리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그걸 등 뒤로 차갑게 느낄 수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친척으로부터, 아빠의 친구들로부터, 지인들로부터. 어떻게 해야 빨리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이 모든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찮은 존재이기를 꿈꿨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런 것에 능숙한 사람이 어른스러운 거라면 평생 어른이 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미리 더 나은 사람이 될걸"이란 가정법이 혼자 있을 때마다 나를 덮쳤다. 최근의 내 일상은 자괴감의 빠지는 나와 그걸 위로하는 나, 두 자아의 혼란스러운 충돌의 연속이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어떤 자아를 내보여야 할지 몰라 말문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의연한 척을 하다가도 가끔씩 갈피를 못잡고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얼마 전에는 J를 만났다. J와 술을 마시는 도중에도 수렁에 빠지는 나와 의연한 내가 번갈아 나왔다. 두서없는 발화 속에서 나는 J에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날 J와의 대화 속에서, 나의 머뭇거림 속에서,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J의 따뜻한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불가능한 어른이 되려고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저녁 J에게 긴 편지가 왔다.
...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전부 살 수는 없지만, 포기한 만큼 다른 무언가를 얻기도 하잖아. 기회비용 같은 거지.
너에게 닥친 버거운 상황을 어쨌든, 너는 지나고 있는데 담담한 모습이 마음 아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
그 상황을 의연하게 얘기하는 네 모습을 보고 대신 울고 싶었어. 애써 빨리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고.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될 거고, 넌 멋진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나 역시 차근차근 어른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했어
Y야, 며칠 전 내가 앵무새 죽이기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기억나는 구절이 있어.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우리, 용기 있는 사람 되자. 그렇게 살아가자.
너의 삶에 항상 용기가 함께 하길 진심으로 바랄게.
응원해. 너를.
서툰 나를 비하하면서도 남들에게는 괜찮은 척하는 나의 모순을 알아채 준 친구의 편지가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눈물이 났다. 역시 너무 애를 쓰면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마련이구나. 그렇게 애써온 나 자신에 대해 미안하고 애잔한 마음도 들었다. 언젠가 어른이 된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만 알고 있다면, 그렇게 애쓸 필요는 없었는데. "패배할 걸 알면서도 시작하고 끝까지 해내는 것이 용기다." 이 문장에는 오랫동안 눈길이 갔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전에 먼저 용기를 내야만 한다.
그러니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이란 존재가 아무것도 낯설어하지 않고 능숙히 대처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어른에게 용기란 무의미하다. 하지만 나는 도망가고 싶고 패배할 걸 아는 상황에서도, 주저하며 발을 떼고, 머뭇거리면서도 말을 꺼내고 싶다. 무엇이 기다릴지 모르는 닫힌 문 앞에서도 기꺼이 문을 밀고 싶다. 그런 것이 용기라면, 나는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용기 있는 사람이고 싶다. 이런 다짐 끝에 나를 위로하는 자아가 내게 속삭였다. 난 능숙하지는 못하지만, 패배할 것을 알아도 어쨌든 시작했다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도망가지 않았다고. 서투르지만 용기 있었다고.
그래서 나도 너에게 답장을 한다.
오늘 어떤 영상을 봤어. 누군가는 자신을 딛고 올라서는 것도 힘들어 고산병에 걸린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춘기가 지나도 언제나 성장통을 동반하는 것인가 봐. 주저앉았을 때 갑자기 일어나면 머리가 핑 돌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속도로 천천히 일어나자. 삶이 흔들릴 때는 함께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손을 잡자. 우리는 충분히 용기 있는 사람이니까. 그럼 언젠가는 우리도 모르는 새 어른이 되어있을 거야.
너를 응원하기 위해 너의 문장을 빌릴게.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될 거고, 너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상단 그림 Georgia O'Keeffe -Sky Above Clouds III